누군가가 커피를 마시다 쏟아버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나요? 함께 있던 친구가 되었든, 카페에서 일하는 직원이 되었든, 깜짝 놀라서 휴지를 챙겨 오지 않을까요? 그리고 다치거나, 옷에 묻지 않았는지 걱정하는 마음에 물어봅니다. “괜찮아?”
한 번은 매장에서 일하는 중에 손님이 커피를 테이블과 옷에 쏟아버렸다. 나는 부리나케 휴지를 들고 가서 물었다. “괜찮으세요?” 그랬더니 손님이 대뜸 날카롭게 대답했다. “괜찮아 보이세요?”
으음, 그때 나는 당황한 채 얼렁뚱땅 정리하고 왔다. 괜히 내가 실수한 건가 싶은 마음에 커피를 새로 한잔 드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가 찝찝하다. 커피를 쏟아서 옷이 더러워졌거나, 화상을 입었다면 괜찮지 않은 게 지당한 사실이다. 그런데 왜 하필 나는 당연한 사실에 괜찮은지 물어봤을까,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은데 말이지. 나의 질문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내심 마음을 위로했지만, 입 속에 남는 텁텁한 느낌은 없어지지 않는다. 제가 뭘 잘못했을까요?
어쨌든 소심한 나는 그 뒤로 한참을 생각해봤는데, 우리는 보통 누군가를 걱정하는 말로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꼭 ‘괜찮아?’라고 말하게 된 것일까. 괜찮든 괜찮지 않든 그건 당사자의 마음인데 말이다.
어쩌면 ‘괜찮아’라는 단어는 더 이상 감정이나 마음을 담아낼 수 없는 상투적인 단어가 되어버린 게 아닐지. 어떤 마음이나 의미를 전하기 위한 것이 단어의 본래 목적인 셈인데, 본질적인 가치를 잃은 셈이다. 속 없는 말을 듣자, 손님은 도리어 불쾌해졌을지도 모른다.
카페에서 일하다 보면 형식적으로 껍데기만 남은 말들이 입에 붙기 마련이다. 그런 말들이 나도 모르게 입 속에 묻어 나온다.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매일 수십 번씩 하면서 자연스레 영혼과 감정이 사라진 메마른 소리의 울림만이 나온다. 이건 늦가을 고목나무에 매달려 혼자 쓸쓸히 울고 있는 매미 소리 같은 것이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허무한 울림이다. 속 없는 인사를 듣고 받아주는 손님은 없다. 그 울림에는 자본주의적 서비스만이 반응한다. 어떤 감정이나 마음은 없다. 다만 규칙이 있고, 시스템이 있을 뿐이다. 손님도 자본주의적 서비스를 원하고, 사장님도 자본주의적 서비스를 원하고, 직원들도 그에 따른다. 자본주의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뼛속 깊게 느낀다. 우리는 서로 간에 어떤 감정이나 마음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적절히 필요한 시스템과 규칙 하에서 서비스를 하고 단어를 선택한다. 단어의 의미는 더 이상 마음이나 감정에 속해 있지 않다. 그런 단어와 속 없는 말은, 자본주의적 울림이 있는 늦가을 매미 울음소리 같이 허무하고 쓸쓸하다.
어쨌든 나는 ‘괜찮으세요.’라는 말이 아닌 다른 좋은 단어가 있을지 생각해봤지만. 아직 서비스 경험이 부족한 나로서는 친절하면서도 센스 있는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경험 부족이다. 아무튼 이런 골치 아픈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생각할수록 그때 생각에 입 속이 텁텁해진다.
카페에서 일을 하다 보면, 말의 표현 부분에서 애매해지는 게 몇 가지 있다. 일종에 시스템화의 허점이다. 한 번은 예전에 일했던 매장에서 손님에게 주문을 받을 때, “이러이러한데 괜찮으세요?”라고 묻는 표현을 하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기도 했다. 뭔가 강요하는 뉘앙스를 품고 있기도 하고, ‘괜찮지 않은데요’라고 말하면 뭐라 할 말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긴, “아메리카노가 조금 진한 편인데 괜찮으세요?”라고 물어봤는데, “괜찮지 않은데요”라고 대답해버리면, 주문하는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래서 그 매장에서는 “저희 아메리카노는 조금 진한 편입니다.”라고 말한 채 그냥 주문을 받으면 된다고 교육받았다. 음…? 이것도 뭔가 상당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은 지. 약간의 통보성 주문 방식이라고 할까.
아무튼 사람을 대하는 일은 정말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