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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잡문인 Nov 11. 2019

따뜻한 아아 주세요

  따뜻한 아아 주세요.라는 주문을 받아본 적 있는지. 나는 있다. 몇 번 있다. 처음 따뜻한 아아 주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으흠, 나에게 퀴즈를 주셨군. 정답이 뭐지…라고 한참 고민했었는데. 이제는 지겨워, 에휴, 하면서 뜨거운 아메리카노 맞으세요?라고 물어본다.

  추측하건대,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메리카노는 당연히 아이스 아메리카 노지.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서, ‘아메리카노’라는 명사가 ‘아아’라는 명사로 동일하게 입력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네. 따뜻한 커피가 먹고 싶어.’라는 생각으로 카페에 들어갔다가 무의식적으로 따뜻한 아아주세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게 되는 게 아닐까.

  따뜻한 아아 주세요.라고 주문하는 손님에게 따뜻한 아메리카노 맞으세요?라고 되물으면, 웃으시면서, 아하, 네. 맞아요. 하하. 하고 대답한다. 그러다 이내 손님이 “아, 아니요. 그냥 아아로 주세요.”라고 메뉴를 변경하는데, 역시 아메리카노는 아이스다. 얼죽아.

  나는 따뜻한 커피를 좋아해서 여름에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사우나와 온탕을 좋아하는 체질 탓인지 뜨끈한 게 좋다. 그래서 얼어 죽어도 아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다들 보면 카페에 가면서 “으으, 너무 추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셔야겠어”라고 말하면서, 카페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려는 순간, 언제 그랬었냐는 듯이 아아를 주문한다. 옆에서 “너 춥다며. 괜찮아?”라고 물어보면, 몰라. 아아 먹고 싶어,라고 대답한다. 그 속내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심리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아마도 몸속에 잠자고 있는 흉폭한 난쟁이 때문이 아닐까. 난쟁이는 평소에 조용히 잠자고 있다가, 커피 냄새만 맡으면 잠에서 깨어나 흉폭하게 소리친다. “아이스. 아이스 가져와. 커피 냄새나잖아. 아이스. 아아를 주문하란 말이야. 당장. 지금 나는 화가 굉장하다. 아이스!”

  난쟁이 소리가 워낙 시끄러워서 에휴, 지겨워. 하면서 난쟁이를 잠재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따뜻한 커피를 먹고 싶다가도, 이내 아아를 주문해버리고 만다. 이런 흉폭한 난쟁이가 있지 않고서는, 얼죽아는… 으흠, 이해하기 어렵다. 

  흉폭한 난쟁이는 어째서 흉폭해졌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봤을 때, 그건 아무래도 직장 내의 갑질이나 업무 과로, 복잡한 출퇴근길, 어려운 인간관계 같은 일들이 끊임없이 난쟁이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지. 그래서 카페에만 가면, 난쟁이는 그동안 쌓아 둔 스트레스가 폭발해서 “아이스! 아이스!”하면서 소리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카페에서 친구들에게 속에 쌓인 일들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이것만큼 시원한 게 없다고 느꼈다. 그동안 쌓인 일들을 몇 시간이고 친구에게 털어내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친구와 헤어질 때는 속에 응어리진 화가 다 풀어져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건 분명, 나름대로 건강한 생활 요령인 셈이다. 지난 수요일에 회사에 있었던 누구누구 씨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니 말이야.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무래도 이럴 때는 아아를 먹을 수밖에. 하고 흉폭한 난쟁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카페에서 한참 일하다가 숨 돌릴 시간이 생기면 다 같이 모여서 커피를 한 잔씩 마신다. 그럴 때면 다른 직원들은 일하면서 몸에 열이 오르고 피곤해져, 급한 불을 끄는 소방관처럼 열을 식히려고 아아를 마신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도 여전히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정말 나는 왜 그렇게 ‘아아’가 마시고 싶지 않을까? 카페에 가서 주문을 할 때 습관적으로 ‘으음, 아이스 따아를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까지는 아니지만, 시원한 커피가 먹고 싶다가도 카페에 들어가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된다.

  여름에도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게 좋은데, 나는 혹시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내 속에는 “핫. 핫. 핫을 달라. 뜨거운 거!”라고 수염 난 난쟁이가 노곤노곤 소리치고 있는 게 아닐지. 가끔은 나이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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