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다. 한 손님께서 들어오시면서 당당히 주문하셨다. “아프리카노 한잔 주세요.”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나는 아프리카노라는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뭐지. 아프리카노? 어째서 아프리카노지?’ 나는 손님이 무안해할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 아메리카노로 주문을 받았다. 그런데 뒤돌아서 생각해보니 너무 웃기고 기발했다. 생각도 못해봤다. 아프리카노라니. 으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렇고 말고.
그런데 이렇게 헷갈리게 주문이 들어오면 꽤나 난감하다. 아프리카노는 대충 눈치를 채고, 아메리카노라고 생각해서 잘 맞췄기에 다행이다. 만약 “카페치노 한잔 주세요”라고 말해버리면, 카페라떼인지, 카푸치노인지 알 수가 없다. “카페라떼 말씀이세요?”라고 되물으면, 손님이 잘못 말한 걸 느끼고 창피해하신다. 그런데 잘못 말한 걸 느끼신다면 다행이다. 되려 왜 또 물어보냐는 듯이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네.”라고 대답하는 손님도 있다. “그것 하나 잘 못 알아듣고, 왜 또 물어봐?”라는 표정이다. 괜히 기분이 나빠진다.
주문을 받을 때, 난처해지는 경우가 몇 가지 있다. 최근에 가장 많이 겪고 있는 경우는 ‘대화체 주문’이다. 손님들끼리 어떤 걸 먹을까 하고, 고민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주문하는 것이다. “저번에 이걸 먹었으니까, 오늘은 에이드를 먹을까 봐”, “나는 오늘 커피를 하나도 못 마셔서 커피 마시려고.”라고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네, 주세요.”하고 카드를 건넨다. 음, 이럴 때면 무척 당황스럽다.
나의 경우에는 손님의 개인적인 대화는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최대한 귓속에 필터를 장착하고 필요한 내용만 들으려고 노력한다. 말하자면 손님의 대화 속 문맥을 이해하거나 머릿속에 통과시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적당히 귓전에서 듣다가 다시 흘려보낸다. 듣기로는 에이드, 카페라떼, 아메리카노 같은 메뉴의 이름은 들었던 것 같은데… 하는 식이다. 그래서 그걸 주문하겠다는 건지, 먹어봤었다는 건지, 내용은 알 수 없다. 갑자기 ‘네. 주세요’ 하고 카드를 내밀면 나는 굉장히 난처해진다.
반면에 손님의 대화를 자세히 들으면서, 대화에 참여하는 유형의 직원도 있다. “저번에 이걸 먹었으니까, 오늘은 에이드를 먹을까 봐”라고 손님이 말하면, 2차선에서 1차선으로 끼어드는 택시처럼 잽싸게 끼어든다. 능숙하다. “저번에 이걸 드셔 보셨으면, 이걸 추천드려요.”라고 시작해서 줄줄이 설명한다.
어쩌면 이쪽이 조금 더 노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지켜보는 사장님은 흐뭇해할지도. 그런데 말이지. 으흠, 나는 아무래도 이런 쪽은 불편하다. 직원의 입장으로도, 손님의 입장으로도 스스로 생각하고 메뉴를 선택할 권리를 보장받고 싶다(고 할까요).
어디까지나 서비스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나의 경우는 최대한 존중하는 서비스, 다른 쪽은 최대한 참여하는 서비스인 셈이다. 영업의 측면에서는 후자가 훨씬 이득이겠지만.
또 한 번은 주문을 받는데 너무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손님이 있었다.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 그럴 때는 순간적으로 내 귀가 멀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주문을 하고, 주문을 받는 것은 대화의 일부분이다. 자신의 말을 정확히 전달하고, 듣는 게 중요하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데, 앞뒤 문맥을 생략하는 방법이나,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하거나,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이 없다면.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지시나 명령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주문은 일방적인 서비스가 아니라, 일종에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나저나 아프리카노 주세요. 같은 주문은 너무 재미있었다. 이런 식의 유쾌한 대화는 언제나 환영이다. 비록 주문하신 손님은 뒤돌아서서 창피해하셨을지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