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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구마깡 Jul 07. 2023

남남북녀

헌서는 남편과 함께 남한에 정착한 지 몇 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의 삶은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 변화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남한에서의 삶은 그녀에게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새로운 무대였다. 남편의 따뜻한 마음씨와 시댁의 이해심 덕에 헌서는 그나마 편안하게 남한에서의 일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배려 깊고 성실한 남자였고, 시댁도 생각보다 열린 사람들이었다. 시댁 사람들은 그녀가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고 진심으로 받아들였기에, 헌서는 점점 그들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남한의 도시에서의 일상이 낯설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매일 아침 출근길에 느껴지는 도심의 분주함에도 익숙해졌다. 회사에서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의에 참석하고, 동료들과 점심을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는 일상은 헌서에게 새롭고도 값진 경험이었다. 그러나 가끔씩 헌서를 당황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몇몇 사람들의 무례한 말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헌서의 배경을 마치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아, 그녀의 감정을 짓누르는 듯한 말을 던지곤 했다.


어느 날은 택시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헌서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들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던 중, 택시 기사가 느닷없이 말을 걸었다. "아가씨, 혹시 북한에서 오셨어요?" 헌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사는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북한 여자들이 예쁘다는 말, 들어봤죠? '남남북녀'라고 하잖아요. 남한 남자들이 예쁜 북한 여자 만나 살면, 콧대만 높은 남한 여자들은 노처녀로 늙겠어요. 하하하."

헌서는 순간 당황했다. '남남북녀'라는 말이 이렇듯 비꼬인 형태로 사용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기사님이 이 말을 하는 순간 그의 아내가 곁에 있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헌서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창밖의 빛나는 도시의 불빛들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잠재우려 애썼다.

남한에서의 인터넷 사용도 헌서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입한 커뮤니티에서는 가끔 성별 갈등으로 서로를 헐뜯는 싸움이 벌어졌고, 그럴 때마다 헌서는 무서운 마음이 들곤 했다. 특히 그들이 북한을 두고 벌이는 말싸움은 헌서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남자들은 북한 여성을 군대도 다녀오고 결혼 후 내조도 잘하는 이상적인 배우자로 묘사하며, 남한 여성들을 조롱하기 일쑤였다. 반대로 여자들은 한남들이 개성공단에서까지 성매매를 한다며 비난하고, 이른바 '기쁨조' 출신을 데려와 퐁퐁남이 된다며 혐오 섞인 말을 쏟아냈다. 헌서는 이런 글들을 읽을 때마다 그들이 과연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인터넷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헌서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고, 가급적 커뮤니티를 멀리하려 했지만, 인터넷을 쓸 때마다 조바심이 나곤 했다.


리 대리는 송 대리와의 대화 속에서 남녀 관계의 복잡함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도 남녀 간의 갈등은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아내와의 일상적인 다툼에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정답이란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남한에서 벌어지는 남녀 갈등은 과연 부부처럼 합의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그는 이 의문을 품고 송 대리에게 물었다.

"송 대리님, 이게 진짜 남녀 싸움으로 끝날 문제인가요? 남자와 여자가 이렇게 서로 목을 조르는데, 이게 정말 해결될 수 있을까요?"

송 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리 대리님 말이 맞아요. 하지만 이 문제는 복잡해 보여요. 서로를 비난할 거리만 찾고, 틈이 보이면 물어뜯으려는 듯해요. 이런 건 비단 남녀 관계뿐만 아니라 연예인, 특정 계층, 특정 직군 등도 예외가 아닌 것 같아요. 기회만 되면 상대를 깎아내리려는 관음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아요. 정치와 언론이 조금만 부추기면 혐오가 폭발하는 것도 이해가 가고요."

리 대리는 송 대리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드높이려는 욕구는 모두에게 있지만,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서 생기는 좌절감이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표출되는 듯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근무 시간이 다가왔다. 리 대리는 송 대리를 다시 한번 축하해 주며 결혼식에 꼭 가겠다고 인사를 남기고 식당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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