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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구마깡 Feb 18. 2023

남한에서 온 상사는 다를 줄 알았지

삼성전자 개성공단 캠퍼스의 리 대리 -2-

오 책임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 직전이라 책임과 이야기 후에 점심을 먹으러 가면 될 듯했다. 책임 자리는 사무실 안 쪽에 있 방으로 직원들과는 따로 있다. 남한에서는 임원정도 돼야 이런 대우를 받았는데, 여기서는 책임급에게도 개인 사무실이 주어졌다. 명목상으로는 보안이라고 한다. 이 나라에는 중국 기업도 많이 있으니 언제 기술이 탈취되지 않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지만 리 대리가 보기엔 그 이유만은 아니다.


"리 대리 왔나요?" 오 책임이 물었다.

"안녕하세요." 리 대리가 대답했다.


오 책임 뒷벽에는 북한 최고지도자 사진 세 개가 나란히 걸려있다. 삼성전자가 개성공단에 들어섰을 때 당은 모든 사무실에 최고지도자 사진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하도록 요구하였다. 남한 임직원은 길길이 날뛰며 반대했다. 타국의 정치 압력이 기업에 대놓고 이렇게 가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이러면서까지 굳이 우리가 개성공단에 들어가야 하냐고, 사내게시판에서 난리가 났다. 그러나 당의 입장은 강경했고 직원의 하찮은 불만, 불평은 위에서 가볍게 무시됐다. 그뿐이다. 비치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책임 뒤에 걸린 사진들은 먼지가 너무 묻어서 뿌옇다. 심지어 가운데 사진은 좀 삐딱하기까지 했다. 마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실내 장식물 같았다. 옛날면 최고존엄 모욕죄로 감옥살이었다. 상사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얘기했다.


"이번 위클리 리뷰 메일 봤어요?" 오 책임이 물었다.

"네?" 리 대리가 조금 놀란 듯 대답했다.


리 대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오 책임을 바라봤다. 엔지니어 출신이지만 양복을 항상 차려입고, 머리는 포마드 형태로 이마가 드러나게 뒤로 넘겼다. 캐주얼로 후줄근하게 차려입은 리 대리나 다른 북한 엔지니어와는 이질감이 들었다. 눈도 마주칠 것 같지 않은 상사가 잠시 리 대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모니터를 본다. 눈길 줘서 영광이다, 이 자식아.


"이번 주간 검토 메..전자우편 봤는지요?"


위클리 리뷰 메일. 리 대리도 다 아는 어다. 자료 대부분을 리 대리가 작성을 했다.


"네 봤습니다." 리 대리가 대답했다.

"그럼 잘 알겠네요. 저번주 수율이 왜 엉망일까요?"

리 대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저번주에 말씀드렸다시피 세정액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여러 번 쓴 세정액을 업체에 맡겨 클리닝 한다 해도 순도면에선 새 제품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이제는 꼭 새로운 세정액을 들여와야 합니다."

"리 대리, 그건 이미 저번에 보고한 거잖아요.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듣고 싶지 않아요. 저번주에 더 나빠졌다고요."

"다시 들어온 세정액 순도가 저번보다 떨어졌습니다. A동은 이미 저번주에 또 구입해서 쓴다고 하는데 왜 B동은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요?"

"리 대리님." 오 책임은 마치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까운 듯 리 대리를 바라보았다.


"클룸 제대로 작동하는지 체크해 봤나요? 필터는요? 만약 세정액 순도가 떨어졌으면 공급업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또 보내야죠. 이 모든 걸 일일이 제가 알아보고 지시해야 하나요? 리 대리는 다 좋은데 자꾸 A동 상황만 살피는 게 문제예요. B동 좀 챙겨봐요."


그건 A동이 남한 사람으로만 채워져 있고, 거긴 지원이 좋으니까 비교할 수밖에 없잖아요. 리 대리는 목구멍에서 맴도는 이 말을 애써 참았다. 다행히 배고픔이 이 기분을 가라앉혔다.


"오늘까지 세정액 외에 다른 원인을 기재해서 제출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점심인데 식사하러 가셔야죠."

"네 책임님도 맛있게 드세요."


인사를 하고 뒤돌아 문으로 향하는 리 대리에게 책임이 마지막 말을 했다. "그리고 시간 나면 틈틈이 영어공부 좀 하세요, 동무?"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힌다. "곧 인사평가가 다가오잖아요. 영어성적표 제출해야죠." 오 책임이 마지막 말을 건넸다. 어쩐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네." 리 대리는 어설픈 목례를 하고 오 책임 방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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