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대리! 혼자서 밥 먹고 있어?" 박 대리가 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 리 대리에게 다가갔다. 리 대리의 표정은 생각에 잠긴 듯 침울했다.
"무슨 일이야?" 박 대리가 물었다.
"오 책임이랑 얘기 좀 하고 왔어." 리 대리가 대답했다.
"너만? 책임이 너 왜 불렀는데?" 박 대리가 물었다.
"그냥...... 이것저것 까더라." 리 대리는 한숨을 쉬며 식판을 본다.
"하아~. 그 자식 내가 언젠가 보내버릴 거야." 박 대리가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리 대리는 박 대리를 조용히 바라봤다. 박 대리는 항상 자신감이 넘쳤다. 소문에 의하면 박 대리는 당 고위간부의 자녀 혹은 가까운 친척이었다. 이건 남한 직원들도 다 아는 사실로 누구도 박 대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남한 직원만 일할 수 있는 A동에서 박 대리가 아무 탈 없이 지낸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그것도 아주 잘 나간다. 리 대리는 자신이 어떻게 박 대리와 오랫동안 보고 지내는지 신기할 뿐이다. 같은 대학교, 같은 학과만 나왔을 뿐이지 동문이라는 사실 외에는 둘 사이에 공통점은 없었다.
리 대리는 박 대리의 왼쪽 소매 사이로 살며시 보이는 금은빛을 내는 시계를 봤다. Rolex. 아무리 사치품에 관심이 없는 리 대리지만 저 글자는 안다. 뉴스에 나오는 고위간부가 차고 나오는 시계이다. 몇 년을 모아야 저걸 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관뒀다. 이 녀석은 어떻게 이런 시계를 갖게 됐지? 가족선물? 뇌물? 다른 돈 줄이 있나? 괜스레 리 대리는 박 대리가 얄미워지다가도 다가와 준 박 대리한테 이게 뭔 생각인가 하고 자괴감이 왔다. 예전에는 이런 사치품을 대놓고 가지고 다니면 공안에서 잡아갔는데...... 누가 신고하면 어쩌려고. 동기를 앞에 두고 시계 생각에 빠진 리 대리한테 박 대리가 말했다.
"이거 중요한 소식인데 아직 다른 직원한텐 말하지 마?" 박 대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뭔데?" 리 대리가 눈을 들어 물었다.
"인사팀에서 나온 얘기야. 이번 인사평가에서 선임급 이상으로 승진하면 서울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거래." 박 대리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서울. 서울 발령은 삼성 내 모든 북한 직원의 꿈이다. 아니 이 회사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이라면 모두 꿈꾸는 곳이다. 서울에 가게 된다면. 서울에 갈 수만 있다면. 서울에 갈 수 있을까? 리 대리는 가벼운 두근거림을 곧바로 가라앉히고, 식판을 바라보면서 관심 없다는 듯이 물었다.
"확정된 사안이야?" 리 대리가 물었다.
"확정까지는 아직 모르고 실현 가능성이 큰 가안이라고 하자." 박 대리가 대답했다.
리 대리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깨작깨작 헤집었다. "승진하면 서울로 갈 수 있는 TO는 얼마나 나올까?"
"한 명." 박 대리가 단답했다. 깨작거리던 젓가락이 멈췄다. 이 녀석이. 그럼 거의 너라는 얘기잖아. 밥맛이 달아났다. 롤렉스 시계가 다시 눈에 띈다. 감찰반 전화번호가 뭐였더라?
"흥미롭긴 한데, B동에서 그런 얘기가 없는 거 보면 아직 모르는 거네." 리 대리가 마치 흥미 없다는 듯이 말했다.
"좀 기다려봐. 금방 발표날 거니까. 모처럼 없는 기회인 만큼 인사팀에서 여러 요소를 고려한다고 하니까 너도 기대해도 될 거야. 근데 이건 다른 직원한테는 아직 비밀이야?" 박 대리가 다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알았어. 난 이제 현장 들어가 봐야 해." 리 대리가 일어섰다.
"응. 난 이제 우리 팀 사람들과 먹을 차례야. 나중에 술 한잔 하자고." 박 대리도 같이 일어섰다. 그리고 멀리서 다가오는 무리에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권 책임님! 차 선임님! 여기 자리 있어요!"
리 대리는 식판을 반납하고 현장으로 향했다. 서울 가는 건 그렇다 치고 북한 사람으로서 승진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온몸으로 헌신을 해야 선임이 될까 말 까다. 책임자리부터는 북한 출신이 아예 없다. 보안 때문이라고 하지만 남한에서 온 직원이 북한 사람한테 수그린다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되기 때문이다.
사실 개성공단캠퍼스 최고 임원 자리에 북한 사람이 한 명 있긴 하다. 당 최고위간부 출신으로서 삼성전자를 감시한다는 명목하에 당에서 은퇴하고 들어왔다. 전관예우다. 하지만 회사 경영은 전혀 신경 안 쓰고, 좋은 연봉과 오피스에 출근해서 시간만 보내고 들어간다. 이로 인해 다른 직원들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남한 출신 직원들도 북한 출신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 데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보이지 않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로서는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일 뿐이다.
리 대리는 수율 관련 자료를 꼼꼼히 수정하고 제출까지 하고 난 다음에야 퇴근할 수 있었다. 오늘은 유독 고단한 하루였다. 들어오니 아내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늦었네? 저녁은 먹었어?" 아내가 물었다.
"회사에서 먹고 왔어. 아이들은 어디 있어?" 리 대리가 신발을 벗으며 대답했다.
"아직 둘 다 학원에 있을 거야. 끝나려면 한 시간은 더 지나야 해." 아내가 말했다.
"요새는 더 늦게까지 공부하나 보네."
"난 학부모 모임 때문에 준비하고 나가봐야 해. 양말 제대로 벗는 거 잊지 말고." 아내가 안방으로 들어가려다 리 대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았어." 리 대리가 양말을 거실 한 쪽으로 던지려다 대답했다.
샤워를 마친 리 대리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소파의 부드러운 감촉이 노곤함을 잊게 하는 듯했다. 회사에서 겪은 스트레스와 박 대리와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고 싶었다. 역시 집이 최고야.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리 대리는 오늘 하루를 되새겨보았다. 책임의 꾸짖음, 박 대리의 야심, 그리고 자신의 무력감까지. 모든 것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것들을 잊고 싶었다.
TV를 켜고 뉴스를 볼까 하다가 앞에 신문이 보여 들었다.
신문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딸이 귀가했다. 아내는 안방에서 화장하다가 나와 딸을 맞이했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일찍 나왔어요."
"왜? 어디가 안 좋아? 생강차 만들어줄까?"
"그냥... 피곤한가 봐요. 쉬면 괜찮을 거예요."
"그래 피곤할 땐 무리하지 말고. 냉장고에 반찬 있으니까 배고프면 꺼내먹어."
딸은 아빠한테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방에 들어갔다. 섭섭함과 '그래도 내가 가장인데'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 교차하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학교 끝나고 바로 학원 가니까 힘들었겠지. 리 대리와 아내에게 딸은 보석 같은 존재다. 전교 수석 아니면 차석을 굳건히 지켜 리 대리가 회사에서 자녀 얘기가 나오면 목에 힘을 줄 수 있는 순간을 줬다. 그에 비해 아들 녀석은... 에휴.
딸은 방문을 닫은 후 소리가 나지 않게 잠갔다. 가방에서 조심스레 폰을 꺼내어 침대에 털썩 엎어져 폰을 켰다. 잠시 후 폰 화면에 'Samsung Galaxy'라는 문구가 떴다가 사라졌다. 북한에선 사용이 금지된 기종이다. 딸은 홈화면이 나올 때까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잠시 후 홈화면이 나왔고 인스타그램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