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 밖 돈 벌기의 시행착오 3 ] 통장의 돈보다 잃기 싫은 것
막상 일을 시작하자, 여러 변수가 끼어들며 상황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해왔던 업무에 비하면 절대적 난이도가 낮아 보였지만, 익숙하지 않은 일에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 마음대로 일을 몰아서 하다 보니 일이 몰린 날의 업무량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어나자마자 자기 전까지 일만 하는 날도 생겨났다. 부쩍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주변 사람들은 “너 일을 왜 이렇게 많이 해?”라고 물었고, 나는 그 소리가 유독 듣기 싫었다. 머릿속으로는 안부 인사나 별 다른 의미 없이 한 말임을 알고 있지만, 나에게는 내가 지향하는 바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도 어딘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최소한으로 하려고 퇴사한 마당에 대체 뭐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고, 마구잡이로 벌려 놨던 일을 수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일을 줄이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프리랜서 공고를 읽고 ‘잘할 수 있는 이유’를 담은 짧은 자기소개서를 보내고, 간단한 면접 과정을 거쳐 계약서 쓰고, 짧지만 수습 기간을 거쳐, 익숙해지기 위해 업무를 반복하고, ‘덕분에 감사하다. 오래오래 잘 부탁한다’라고 말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일을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취업준비생 때처럼 매우 힘들게 얻은 일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은 일자리인 데다, 변덕을 부리는 것보다는 꾸준하게 하는 것이 좋다는 사회적 통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일을 조절하는 행위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 회사를 다니던 현대인에게는 일 조절 근육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회사에서 준 일의 양의 관계없이 어떻게든 소화하는 것이 근로자의 기본 능력이다. 일을 조금 주면 기쁨을 티 내지 않은 채 자유 시간을 늘리고, 일을 많이 주면 그에 맞게 부지런히 추가 근무를 하는 식이다. 나 역시 매일 써야 하는 기사는 물론 크고 작은 일들이 밀려올 때, 일일이 저항하기보다 순응하며 묵묵하게 일을 다 해내는 타입이었다. 애초에 일 조절에 대한 필요성이나 가능성에 대한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고, 근육을 기를 트레이닝 시간은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빨리 끝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같이 주어진 일을 예외 없이 처리한다는 전제 하에 있는 편협한 고민이 전부였다.
퇴사자로서 돈 버는 계획은 구체적으로 세우지 않아도, 어영부영 살다가 관성에 따라 슬그머니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분명해야 한다. 구체적일수록 좋다. 일에 관해서 얘기를 하자면, 내 기준은 이랬다. 우선 일의 시간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공간은 자유로워야 했다. 이른바 디지털 노마드로 살 수 있게 언제 어디서든 노트북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을 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의 출근이나 주기적인 오프라인 회의도 용납할 수 없었다. 클라이언트와 실시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도 되는 일, 일정한 근무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작업 양이 정해져 있는 일을 선택했다. 세상에 그렇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싶지만,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찾으면 분명 있다.
초반에는 이러한 기준에 맞는 일을 닥치는 대로 여러 개 구했는데, 생각보다 업무량이 버거웠다. 다양한 일을 한 이유는 한 가지 일로는 먹고살 수 있는 최소한의 수입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일로 충분한 소득을 위해서는 대부분 정기적인 출퇴근 노동을 약속해야 했고, 대신 조건에 맞는 작은 일들을 찾아 상황에 맞게 조립했다. 말이 프리랜서지 아르바이트 개념과 비슷했다. 짧다고 여겨지는 하루 3시간짜리 아르바이트라도 3개를 하면 9시간이 되는 것처럼, 일감들이 모이기 시작하니 회사 다닐 때보다 바쁜 날이 생기기도 했다. 종종 버거움을 느꼈고 작업이 싫증 나는 순간들이 반복되자, 일을 정리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버거운 일들을 모두 유지했다면 깨어 있는 시간 내내 일하며 회사 다닐 때만큼의 수입을 벌어 들일 수도 있었겠지만 과감하게 그만하겠다고 말했다.
일을 정리할 때 보다 정리 상태를 유지할 때 더욱 과감함이 필요하다. 프리랜서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며 일이 갑자기 많아질 때도 있지만, 종종 예상보다 적을 때가 있다. 아무리 최소한의 노동을 고집하더라도, 예상한 최소한의 소득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동요가 일어날 수 있다. 나의 경우 작업량에 따라 부담해야 할 월세의 반도 벌지 못한 달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추가 일자리를 알아보지는 않았다. 당장 통장의 돈을 잃는 것보다 소중하게 지켜온 여유를 잃는 것이 더 조바심이 났다. 어떤 것을 내놓더라도, 일에 허우적거리는 삶은 무엇보다도 피하고 싶은 상태였다.
최소한의 노동을 하겠다는 분명한 기준에는 그보다 더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애초에 왜 나에게 최소한의 노동이 중요한지 묻는다. 책 ‘일하지 않을 권리’는 노동자에게 일하지 않는 시간은 종종 일할 기력을 회복하거나 감각을 마비시키는 물건이나 오락을 소비하는 시간이 됐다고 지적한다. 퇴근 후의 시간이 출근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전락할 때 삶의 우선순위가 의지와 상관없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을 누구나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일하지 않는 나'가 '일하는 나'에 잡아먹히지 않을 그 섬세한 비율은 어딘지, 그 비율의 기준을 시간, 돈, 노력, 결과물 중 어디에 둬야 할지 찾고 있다. 아직 그 방법이나 답은 잘 모르겠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이것저것 넣었다가 뺐다가 하는 중이다. 실험하듯 살다 보면 그 적정한 비율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다.
일하는 시간으로부터 완전하게 독립된 일하지 않는 시간은 어떤 도구나 생산물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때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시간을 투명하게 마주하는 경험은 한번 맛보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 대단한 것을 하지 않아도 그 시간들은 그 자체로 충만하다. 이미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시간이 일하는 시간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착각에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꿈꿔볼 수 있는 시간, 나는 그 시간을 갖기 위해 오늘도 그만 일하겠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