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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May 20. 2024

엘리베이터 앞 나무꾼


탄식을 내뱉는다. 간발의 차로 엘리베이터를 놓쳤다. 나의 손가락은 그 어느 때보다 민첩하게 정삼각형 모양의 둥근 쇠를 눌렀지만, 누군가의 손놀림보다는 느렸다.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기계는 여지없이 기계적으로 판결을 내린다. 내가 늦었음을.


간발의 차이가 주는 분노를 아시는지. 처음부터 높은 층에 올라가 있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은 수많은 후회를 덧씌워버린다. 주차를 조금만 빨리 했다면. 한 걸음만 빨랐다면.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조금만 빨리 눌렀더라면. 나는 결과를 통해 원인을 역추적한다. 단계를 거칠 수록 화는 고리대금업자가 된다. 결국, 최초의 화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엉뚱한 이자만 가득 쌓였다.


양손이 무겁다. 덩그러니 남겨진 커피와 빵봉지가 화를 부채질한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동자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쏘아본다. 마치 그러면 떠난 님이 돌아오기라도 하는 듯. 당최 누군지도 모를 누군가를 원망한다.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멈춘다. 이 정도 높이면 걸어 다녀야 하는 것 아닌가. 아기 엄마라도 탔나. 다시 돌아오겠지 하며 기다리는데 여지없이 배반하는 엘리베이터. 매정하게 다시 올라가고, 4층에서 멈춘다. 혹시 택배기사인가. 지금은 아홉 시 반인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배송을 하고 있는 건가. 아파트 입구에서 배송 차를 보지 못했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데 엘리베이터는 다시 올라가고. 8층에서 멈춘다.


택배기사일 거란 확신이 굳어져 간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층층이 멈출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문이 닫히고 다시 올라가는 시간차를 보라. 매우 늦다. 닫힘 버튼도 안 누르고 아파트 입구에 물건을 내려놓은 뒤 다시 돌아오는 패턴이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올라가고. 11층에서 멈춘다. 그런데 택배 배달은 꼭대기 층부터 내려오는 것 아닌가. 혹시 집배원인가. 아니면 어떤 꼬마가 장난을 치고 있나.


층이 올라갈수록 내 멍청함이 증폭된다. 에토스는 이미 짓밟혔고 로고스는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세라 숨을 죽인 채 존재를 감춘다. 어느덧 내 머릿속에 파토스의 제국이 세워졌다.


14층까지 올라갔던 엘리베이터가 비로소 내려온다. 증오의 불길은 여전히 타오르고, 눈동자 속 노을은 아직 한창때다. 머릿속 서랍에서는 1층에 도착할 누군가에게 쏟아낼 말들의 목록을 정리하고 있다. 9층에서 멈춘다. 왼손에 들린 아이스커피의 부피가 증가함을 느낀다. 얼음이 모두 녹아버렸나 보다. 이에 비례하여 상상 속 아내의 성화가 들러붙고. 기어이 분노의 불길에 땔감을 추가한다.


이제 4층이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보통 이 정도 되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기 마련이건만. 아이들은 없고 어른들만 있는지 잠잠하다. 드디어 1층. 엘리베이터의 문이 슬로비디오처럼 열렸다. 그리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숯불에 물을 끼얹으면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는다. 이른바 ‘슬롭 오버’라는 현상. 펜션에서 고기를 구워 먹다가 종종 화재가 발생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내 마음에도 불길이 치솟는다. 지금 존재하는 건 멍청한 파토스의 제국. 슬롭 오버 현상은 제국의 탑 꼭대기까지 이르고. 펜션이 전소한 것과 같이, 제국을 모두 태워버린다.


토인비가 그랬던가.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라고. 역사가 증명한 흥망성쇠의 법칙에 따라 파토스의 제국 또한 멸망했다. 사실 이건 에토스-로고스-파토스 삼국이 통일됐을 때부터 예견된 일. 삼발이에서 다리 두 개를 빼버리면 쓰러져버리는 것과 같다.


멍청함이 불태워진 잿더미의 현장. 다시 로고스가 눈을 뜬다. 에토스는 무덤에서 살아 나오고. 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비어있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본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내려온 건 불과 몇 분. 나는 신선들의 세계에서 바둑을 구경하다가 폭삭 늙어버린 나무꾼처럼 땅을 치며 후회한다. 나무꾼이 잠깐 사이에 세월을 잊은 것처럼, 나는 잠깐 사이에 이해와 배려를 잊었다. 망각의 대가는 크다. 나무꾼의 육체는 늙었고, 나의 내면은 불탔다.


내면이 불살라진 껍데기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다. 한 손에는 커피를, 다른 손에는 빵봉지를 든 채로. 그 모습이 마치 전설 속 나무꾼의 썩어버린 도낏자루를 닮았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저 비루함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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