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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휘 Oct 29. 2019

향기(냄새)의 추억, 프루스트, & 기생충

프루스트 현상, 후각의 뇌과학

    시크한 검은색 코트 차림의 여자가 지하도를 걷고 있다.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다른 여자가 멀리서 다가온다. 스쳐 지나가는 두 여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는 주인공. 막 스쳐 지나간 낯선 여자에게서 그녀는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낯선 여자에게서 그의 향기를 느꼈다"

한불화장품 오버클래스 아이디 광고, 1996년


    세월이 세월인지라 영상의 화질이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든 수준이지만, 뭐 어쩔 수 있을까. 무려 1996년에 전파를 탄 CF니 말이다. 직접 아이디어도 내고 카피("낯선 여자..")도 썼다. 심지어 맨 뒤에 나오는 "아이디, 오버클래스 아이디" 나레이션도 직접 녹음했다. 28살 무렵 내 목소리다. 내가 들어도 낯설다. 한불화장품의 남성 화장품 브랜드, '오버클래스 아이디'의 광고다. 광고 밥을 먹은 지 25년이 넘었고, 그 긴 시간 동안 수 천 편이 넘는 광고 작업을 함께 해왔지만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다. 뒤돌아보는 여자 주인공의 표정 연기가 지금 봐도 참 멋지다. 수많은 감정이 오가는 찰나의 순간을 너무나 잘 살려낸 것 같다. 혹시 그녀의 얼굴이 낯익다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배우 김선아다. 당시는 무명의 모델이었고, 이 광고가 데뷔 작품이었다.


영화 <타락천사>의 한 장면

    당시에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지만 사실 이 광고의 아이디어는 9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홍콩의 영화감독 왕가위가 만든 <타락천사>의 한 장면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지하도를 걸어가며 스쳐 지나가는 두 여자의 설정과 대사 주인공 "나는 이 향수 냄새에 익숙하지만, 다른 여자에게서 맡기는 싫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표절이라기보다 오마주라고 해두자. 당시 이 광고가 많은 인기를 끌면서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 같은데 직접 출연하기도 했었는데, 나갈 때마다 영화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했었다. 홍콩의 반환(1997년)을 직전에 두고 있었던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당시 젊은 이들의 감성을 누구보다 매혹적으로 그려낸 왕가위 감독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물론 필자도 그중의 한 명이었고.


    "낯선 여자에게서 그의 향기를 느꼈다"에서 "그"는 누굴까? 그 남자는 사실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Brad Pitt)다! 이게 뭔 소리야 싶겠지만 1995년, 그러니까 김선아가 주인공으로 나온 광고 바로 이전 이 브랜드의 광고 모델이 무려 브래드 피트였다. 화질은 엉망이지만 1995년 그야말로 리즈 시절 브래드 피트의 모습이 담긴 광고를 보자.

한불화장품 오버클래스 아이디 광고, 1995년. 브래드 피트.

    당시 광고를 만들던 이들에게 주어진 난감한 숙제는 바로 브래드 피트였다. 브래드 피트가 주인공으로 나온 광고의 후속 편을 만들어야 하는데 심지어 제작비도 넉넉지 않다니. 그래서 우리의 과제는 브래드 피트의 기억을 소환하는 일이었다. 향기를 통해서!




프루스트 현상(The Proust phenomenon).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소설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우리말 번역본 제목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영어 번역본의 제목인 "In serach of lost time"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영어 번역본의 제목은 <Rembrance of things past>다. 우리말로 옮기면 "지나간 것들에 대한 추억"정도가 될 것 같다. 사실 이 소설의 핵심 주제가 '기억'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작가가 간절히 찾아 헤매던 것은 '시간'이라기보다 ‘(잃어버린) 기억'이라고 보는 편이 좀 더 정확할 듯싶다. 프루스트 현상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장면을 통해서 탄생했다.  


홍차가 아니라 영어 번역본의 표현에 의하면 real or lim-flower tea(라임 꽃 차)다.

    지금 이 순간, 프루스트에게 주어진 현재라는 시간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불완전함, 그 자체로 느껴진다. 모든 게 덧없다. 노스탤지어, 그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오직 지난 시간의 추억들뿐이다. 간절히 찾아 헤맨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런데, 갑자기 기억이 돌아왔다! 라임 꽃 차와 마들렌 한 조각을 입에 배어 무는 순간, 그 향기를 통해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소환된 것이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을 보낸 콩브레 마을,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이모가 챙겨주던 마들렌과 꽃잎 차다. 마들렌은 사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과자일 뿐이다. 하지만 직접 맛보기 전까지, 그 향기를 제대로 느끼기 전까지는 카페 쇼윈도에서 본 그 어떤 마들렌의 모습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을 돌아오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소환된 기억은 신기할 만큼 생생하다. 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을 통해 중년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을 보낸 거리의 모습을 바로 눈 앞에 펼쳐진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린다.


    프루스트 현상(proust phenomenon)은 향기(냄새)에 의해 의도치 않게 과거의 기억이 회상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렇게 프루스트 현상을 통해 불러내어진 기억은 비자발적 기억(involuntary memory)이다. 기억을 소환(recall)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향기를 맡는 순간 그 향기와 관련된 기억들이 저절로, 비자발적으로(involuntarily) 재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향기, 혹은 냄새를 통해 소환되는 기억은 '자서전적 기억(autobiographic memory)'이다. 일화 기억(episodic memory)**라고도 부르는 이러한 기억은 개인이 경험한 사건들의 구체적 시간과 장소, 내용 전체를 포함한다. 그런데, 과연 후각(향기 혹은 냄새)은 다른 감각들(시각, 청각 등)에 비해 기억 회상에 더 큰 힘을 발휘할까? 그 비밀은 우리의 뇌에서 후각이 가지는 특수한 신호 전달 경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각, 청각, 촉각과 같은 외부에서 뇌로 향하는 감각 신호들은 모두 대뇌 피질(cerebral cortex)과 중뇌(midbrain) 사이에 위치한 시상(thalamus)이라는 작은 영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시상은 대뇌피질로 운동 신호(motor function)와 감각 신호(sensory signals)를 중계하는 일종의 기지국 역할을 하는 중요한 기관인 셈이다. 그런데 후각 신호가 이동하는 경로는 다른 감각 신호들과 좀 다르다. 외부의 화학 물질이 코에 있는 비강(nasal cavity) 안쪽에 위치한 후각 상피세포(olfactory epithelium)를 자극하면 여기서 발생하는 신호는 먼저 후각 신경구(후각 신경 망울, olfactory bulbs)에 모인 뒤에 1차 후각 피질(primary olfactory cortex, pyriform cortex)로 향한다. 다른 감각 신호들은 감각 신호를 처리하는 대뇌의 1차 감각 영역 등으로 이동하기 전에 시상을 거쳐서 이동된다. 하지만 시상을 거치지 않고 바로 1차 후각 피질로 향한 후각 신호는 이와 동시에 시상 시상하부, 해마, 편도체 등으로 연결된다(Purves (2018). Neuroscience 6th Edition). 달리 표현하면 다른 감각 신호들과 달리 후각 신호는 좀 더 빠른 경로로 시상하부(호르몬 분비), 해마(일화 기억의 생성과 회상), 편도체(감정과 관련된 기억을 처리)와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향기(냄새)는 다른 감각에 비해 더 빠르고 광범위한 연결을 통해 자율신경계의 반응, 주의, 기억, 감정 등에 영향을 미친다(Gazzaniga et al(2019). Cognitive Neuroscience).


    네덜란드의 유트렉트 대학교(Utrecht University)의 신경과학 연구팀은 실제로 프루스트 현상이 작동하는지가 궁금했다. 70명의 여성 연구 참가자들에게 자동차 사고나 르완다 학살과 같이 불편하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짧은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1) 독특한 향기를 뿌리거나, (2) 다양한 색깔의 조명, (3) 잔잔한 음악을 각각 동시에 제공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 다시 참가자들을 불러서 각각 일주일 전과 같은 향기를 뿌리거나, 같은 조명을 비추고, 같은 음악을 들려주는 과정을 통해서 연구 참가자들로 하여금 각각 주어진 단서(cue)를 통해 일주일 전에 본 영상의 내용을 얼마나 잘 회상하는가를 측정하고자 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었다. 예상한 바 대로 연구진들의 결론에 의하면 후각적 단서(향기)에 의해 회상된 기억이 훨씬 생생(detailed)하고 감정이 풍부하게(unpleasant and arousing) 재현된다고 한다. (Marieke B. J. Toffolo, Monique A. M. Smeets & Marcel A. van den Hout (2012) Proust revisited: Odours as triggers of aversive memories, Cognition and Emotion, 26:1, 83-92, DOI: 10.1080/02699931.2011.555475)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후각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화학적 자극(chemical senses)을 감지하는 미각과 후각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은 먹을 것을 구별하는 일이다(Pinel et al, (2018). Biopsychology). 에너지를 얻고 영양분을 주는 좋은 음식과 독이 있거나 상해서 먹으면 탈이 나거나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음식을 구별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유통기한이 두 달쯤 지난 상한 우유를 마시면서 고약한 냄새와 이상한 맛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가 인류의 조상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은 위험을 감지하는 일이다. 불이 나거나 가스가 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또한 생존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할 것이다. 원시 시대라고 치면 멀리서 살금살금 다가오는 사자의 냄새도 맡아야 했을 것이다. 사자가 시야에 보이는 순간엔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테니까. 이와 함께 후각이 지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은 사회적 교류(social interactions)에 미치는 영향이다.


    멍멍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대체 이 녀석들은 왜 길을 나서자마자 오만군데 냄새를 맡으며 여기저기 찔끔찔끔 영역 표시를 하는 건지. 거의 모든 포유류 동물은 페로몬(pheromone), 즉 같은 종의 개체들 간에 생리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화학물질(냄새)을 분비하고 이러한 페로몬은 개체들 간에 공격성성적 행동(짝짓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 호르몬을 감지하는 기관은 그 기능이 퇴화되어서 흔적 기관(vestige, 진화의 과정에서 원래 담당하던 기능이 사라진, 예를 들어 사랑니나 남자의 젖꼭지와 같은 신체 기관을 가리킨다)에 가깝다. 인간의 성행동에 페로몬이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연구들이 없지는 않지만 인간이 의식적으로 페로몬을 감지하고 행동한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각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기억들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다른 어떤 감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무슨 의미일까? 후각이 우리의 두뇌에서 다른 감각들보다 더 빨리, 더 광범위한 영역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페로몬처럼 인간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작용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후각이 인간의 사회적 교류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연구 결과들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들을 보여준다. 저명한 과학 잡지 네이처(Nature)에 소개된 한 연구(https://www.nature.com/articles/srep25026)에 따르면 후각이 예민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적인 연결망이 더 크다고 한다. 여기서 사회적 연결망(social network measure)이란 예를 들어 "친한 친구가 몇 명이나 되는가", "지난 2주 동안 친한 친구들과 몇 번이나 얼굴을 보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지" 등을 측정한 것이다. 후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이 친구도 더 많고 더 활발하게 사회적 교류를 즐긴다는 사실을 연구를 통해 입증한 셈이다. 또한 후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의 경우 후각 신호가 편도체와 더 강하게 연결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도 같이 제시했는데, 달리 표현하자면 후각이 예민한 사람들이 감정적인 기억을 더 풍부하게 가지게 될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그래서 영화 <기생충> 이야기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거지? 제목만 보고 들어온 이들이라면 스크롤하다 포기하고 나갈 수도 있겠다. 자 이제 시작해보자.


    계단. 계단이야말로 영화 <기생충>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아무리 노력해도 개천에서 용이 나기는 불가능해 보이는, 계급과 계층 사이에 벌어진 간격. 그 간격을 계단이 보여준다. 야속한 장대비가 쏟아 내리는 밤에 기택의 가족이 끊임없이 걸어 내려오던 그 수많은 계단은 그 간격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조커>도 비슷한 방식으로 주인공이 오르내리던 계단을 보여주지만, 계단이 내러티브에서 가지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생각한다. 기회가 되면 두 영화에서 <계단>의 의미를 다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지하철 냄새. 나름 완벽해 보이던 기우(최우식)의 "계획"에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지점, 그 순간에 등장하는 것이 "냄새"다. 그럴듯한 옷을 차려입고, 열심히 대사를 연습하며 박사장 가족을 (거의 완벽하게) 속이는 데 성공한 듯 보였지만 기택의 가족이 결코 숨길 수 없었던 것이 "냄새"다. 이선균이 연기한 '박사장'은 기택(송강호)에게서 '지하철 냄새'를 맡는다. 박사장의 아들도 기택 가족에게서 '시궁창 냄새'를 바로 알아차린다.

    냄새를 지각하는 신경 세포(뉴런)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재빨리 그 신호에 익숙(habituate) 해지는 것이다(Gazzaniga(2019).). 냄새의 자극은 처음엔 강렬하지만 빠른 속도로 익숙해지고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잘 못 알아차린다. 기택의 가족은 반지하방에서 나는 냄새, 서로에게서 나는 냄새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사실 서로에게서 냄새가 나는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지하철을 평생 한 두 번 정도 타봤을 박사장에게 '지하철 냄새'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강한 기억을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몹시 역겹고 불쾌한 것이었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은 JTBC 뉴스룸과 함께 한 인터뷰에서  '냄새'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냄새... 사실 지금 저나 이렇게 손 사장님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지만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거리라는 것이 사실 보통 밀접하지 않고서는 힘들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움직이는 동선을 보면 사실 많이 안 겹쳐요. 가는 식당도 다르고 비행기를 타도 예를 들어 퍼스트 클래스와 이코노미 클래스가 있고 항상 공간적으로 나누어지죠" 인터뷰] '기생충' 봉준호 "빈부격차, '냄새'로 풀어낸 이유는…" | JTBC 뉴스    


    '계단'만큼이나 영화 <기생충>에서 계급, 계층 간의 멀어진 간격을 보여주는 것이 '냄새'다. 빈부격차에 따라 삶의 공간(주거 공간)이 분리되고, 생활공간과 동선 또한 겹치지 않을 만큼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세상에서 박사장에게 기택의 가족에게서 나는 냄새는 자신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다. 박사장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기택의 가족이 아무리 그럴듯한 외모(시각)와 말투(청각)를 보여줘도 결코 속일 수 없었던 것이 냄새(후각)였던 셈이다. 만일 영화적인 설정이 아니었다면 과연 기택의 가족과 박사장의 가족이 같은 공간 안에, 서로가 서로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마주하는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계급의 분리가 공간의 분리로, 그리고 공간의 분리가 향기와 냄새의 분리로. 영화 <기생충>은 불편하고 슬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담고 있다.


    한 신경과학 교과서에서는 다른 감각과 비교해 후각이 가지는 의미를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만일 인류에게 단 하나의 감각 기관만이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은 후각일 것이다. 곤충부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들까지 인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동물은 후각에 의존하는 바가 인간보다 훨씬 크다. 후각은 많은 생물들에게 있어 음식을 섭취하고 번식을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동시에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감각 기관 중에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면? 즉 어떤 감각 기관이 사라져도 가장 불편함을 덜 느낄까를 따져 보면 그게 또 후각이다. 냄새를 맡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맛있는 중식 요리를 만드는 이연복 셰프도 있고, 사실 감기에 걸리면 우리는 누구나 잠시 동안이지만 후각을 잃게 된다. 후각이 진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생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유독 후각 신호만이 다른 감각 신호들과 뇌에서 다른 방식으로 처리되는 것일 테고. 그런데 이러한 후각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기능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박사장에게서는 에르메스 향수의 향기로, 기택에게서는 지하철 복도에서 나는 시궁창 냄새로, 그렇게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어떤 이에게는 향기고 어떤 이에게는 냄새다.


    2018년 기준 전 세계 1년 향수 매출액의 규모는 314억 불 정도라고 한다. UNICEF가 전 세계의 아동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1년 기금의 규모는 58억 불이고. 이게 현실이다. 향수를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아직)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혹시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길까 두려워서 나도 향수를 종종 뿌린다. 향기는 다른 어떤 것보다 무의식 속에 강력한 기억의 요소로 작용한 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향수의 역할이란 게 사실 불쾌한 냄새를 맡기 좋은 향기로 위장하는 것이 아닌가?

2013년 박카스 광고. 영상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RJKar_WUtHI


    더운 여름날, 밖에는 비가 내린다. 장마철인 듯하다. 비와 땀이 뒤범벅된 남루한 차림의 택배 기사가 막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비집고 들어온다. 엘리베이터 안은 이미 만원이다.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사람들은 코와 입을 막는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한숨 소리에 택배 기사 아저씨는 어쩔 줄을 모른다. 아마 광고 영상을 보는 사람들의 미간도 함께 일그러질지도 모르겠다. 우리 대부분은 어떤 냄새인지 잘 알고 있고, 유쾌하지 못한 그 냄새가 주는 느낌을 잘 알고 있으니까. 30초에 불과한 이 짧은 광고는 반전으로 끝맺음하며 우리 마음 한 구석에 무거운 짐을 남긴다.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일은 서로의 향기(혹은 냄새..)에 더 익숙해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 표지 커버 사진 출처 : https://www.amazon.com/Madeleines-Elegant-French-Cakes-Share/dp/1594747407


** 기억에 관한 분류와 그 특징들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아래 글 참조

https://brunch.co.kr/@kissfmdj/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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