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아빠가 혼자 키우는 딸에게 전하는 지혜의 서신
오늘 아빠는 이십여 년 동안 한마디 말을 마음속에만 담고 살아온 분을 만났어요.
아버지의 재혼으로 새어머니와 어린 동생이 생긴 이후부터 성인이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한마디를 속 시원하게 겉으로 표현해보지 못한 분이었어요. 용기를 내어 어렵게 꺼내려고 시도했다가도 이내 포기하고 말았지요. 그렇게 참고 넘어가는 상황이 한 번 두 번 늘어났고, 언제부터인가는 그 말을 아예 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가슴속은 점점 타들어갔어요. 담아두기만 하고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마음속의 고통은 더더욱 커져만 갔어요.
그분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새엄마에게로 향하던 아버지의 관심은 곧 새로 태어난 동생의 차지가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어릴 때부터 혼자 자신을 챙겨야 했어요. 씻고, 먹고, 입고, 공부하고, 일하는 모든 시간 동안 철저하게 혼자였어요. 외롭고 두려웠지만 혼자서 견뎌야 했어요. 아버지는 그 아픔에 관심을 주지 않았고 희생을 강요했어요.
"너는 첫째고, 다 컸잖아. 네가 알아서 다 해야지."
그 말을 들으며, 당연히 참아야 한다고 여겼어요. 그렇게 지금까지 오랜 시간을 견뎌 왔어요.
"싫어요."
그 한마디가 하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새엄마를 처음 소개했을 때,
아버지가 재혼을 한다고 했을 때,
이제부터 혼자 자라고 했을 때,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으라고 했을 때,
학원을 다니고 싶어도 안 된다고 했을 때,
빨래, 청소, 요리를 하라고 했을 때,
자기 일은 혼자 다 알아서 하라고 했을 때,
이제 네가 가장이 되어 가족을 챙겨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모든 순간에 그 말을 너무나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싫어요"라는 말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어요. 하지만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길수록 속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갔어요.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싫어요"가 독이 되어 이제는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어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참고 또 참았을까요?
지독한 불안이 자물쇠가 되어 그분의 입을 열지 못하게 했어요. 버림받을 것 같고, 외톨이가 될 것 같고, 혼날 것 같고, 상처를 입을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혼자 고민하고 힘들어하면서 누구와도 고통을 나누지 못했어요. 오히려 아버지가 바라는 모습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 맞추면서 더욱 가혹하게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만 했어요. 터질 듯한 불안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효과적이지 않았어요. 그럴수록 괴로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갔어요.
사랑하는 딸에게 갑자기 새엄마와 동생이 생긴다고 상상해봐요. 아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전혀 아름답고 평화로운 상황이 아니에요. 굉장히 혼란스러운 순간들의 연속이지요. 당연히 불안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것도 대수롭지 않은 불안이 아닌 급격하게 타오르는 격렬한 불안이 마음속에서 들끓게 되지요.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어른도 결코 편안할 수가 없어요. 변화된 환경과 사람에게 적응하는 동안 구성원 모두가 자연스럽게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그 불안은 결코 혼자만의 노력이나 희생으로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가족 모두가 서로를 따뜻하게 다독이며 불안을 건강하게 다루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러한 단계를 거쳤을 때 비로소 서로 간에 조화가 이루어지고 불안이 사그라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구성원들의 균형 잡힌 관계가 항상 보장되는 것은 아니에요.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며 변화에 적절히 적응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아요. 함께하기 이전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신념과 심상이 달라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아빠가 자존감에 대해서 적었던 편지를 읽으면 신념과 심상이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애정이 충만하고 서로 편안함을 주려고 하더라도 자신의 신념과 심상을 수정하거나 다른 이와의 차이를 좁히기가 어려울 수 있어요. 원하지 않더라도 충돌이 발생할 수 있고 서로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길 수도 있지요. 그런 상황에서 차별과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면 불안은 몇 배로 증폭될 거예요. 그때 참고 또 참는다고 마음이 편안해지거나 상처가 낫는 것은 아니에요. 인내의 결실이 항상 달콤하지만은 않아요. 억누르고 견딘 결과가 썩은 열매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어요.
오늘 만난 분이 그런 경우였지요. 싫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관계가 좋아지고 불안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오랫동안 참고 견뎌왔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불안은 더욱 커졌고 삶은 더욱 고통스러워졌어요. 불안을 없애려고 했지만 아무리 내보내려고 해도 절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불안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딸이 불안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생각을 들려주길 바라요. 그분이 자신의 불안을 이해하고 적절히 다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아빠의 생각은 다음 편지에 들려줄게요. 오늘도 사랑해요. 아빠 딸로 태어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