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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반북스 May 14. 2021

강아지 수명을 알게 된 아이의 뜻밖의 반응

[작은 친구들 3호] 박은지의 에세이

* <작은 친구들>은 동물책 소규모 서점 동반북스와 친구들이 만들어가는 매거진입니다. 우리에게 영감을 준 작은 친구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의미 있고 재미 있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매월 15일에 발행되며 4컷 만화와 크루들이 추천한 도서를 비롯해 채식레시피, 일상의 온기를 담은 에세이를 싣습니다.






기나긴 겨울이 끝나니 산책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 왔다. 따뜻하고 선선한 이 짧은 계절이 지나면 대낮에는 땡볕에서 산책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봄과 가을은 내가 리트리버 여름이와 함께 되도록 긴 오후 산책에 나서는 시기이기도 하다. 보통 주말에는 남편이 여름이를 데리고 운동장이나 수영장에 가는데, 미안하지만 오래 걷고 뛸 만한 체력이 안 되는 나는 평일에 집 앞 공원 한 바퀴를 돌고 나면 한동안 벤치에 앉아 광합성을 하고 바람을 쐰다. 여름이는 내 옆에 다소곳이 따라 앉아 허공을 향해 킁킁거리며 바람결에 섞여온 냄새에 집중하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착한 눈빛을 발사해 ‘어머, 멍멍이가 너무 순하다’ 하는 칭찬을 이끌어내곤 한다. 나는 그 멍멍이가 평소에 얼마나 정신 사나운지는 설명하지 않고 잠자코 여름이의 의도치 않은 착한 거짓말에 동참한다. 



하루는 평소처럼 공원 한 바퀴를 돌고 빈 평상에 앉아 한가하게 전자책을 읽고 있었다. 여름이는 익숙하게 내 허벅지를 베고 드러누워 코를 킁킁거렸다. 한동안 조용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어린 여자아이 두 명이 지나가며 ‘꺅 저 강아지 너무 예뻐!’ 하고 비명에 가까운 감탄을 뱉어냈다. 아이들을 대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나는 자주 듣는 반응을 흘려보내며 책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그 아이들은 킥보드를 평상 옆에 주차해놓고 주춤주춤 나와 여름이를 둘러싸고 서서 관심 가득한 눈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가끔 아이들이 여름이에게 관심을 보이면 안전하게 만져볼 수 있도록 자세를 세팅해주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텐션을 보아하니 여름이도 귀찮을 법하고 이날은 나도 귀찮은 마음이 들어 일단 모르는 척했다. 조금 지나면 가겠지 하고 외면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한참이 지나도 가지 않고 들으라는 듯 자기들끼리 ‘만져보고 싶다!’ 하고 몇 번을 주고받았다. 할 수 없이 포기하고 전자책 커버를 덮은 뒤, 차마 먼저 말을 걸진 못하고 초조해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권했다. “만져볼래?” “네!” 


여름이는 사람이 자기를 예뻐해주면 굉장히 격렬하게 꼬리를 흔들고 몸을 비비곤 하는데, 아이들에게는 유독 매너가 있는 편이다. 내가 아이들이 여름이를 만져볼 수 있도록 자리에 앉히고 얼굴을 내 쪽으로 하여 나름의 안전 범위를 확보해주는 동안 여름이는 점잖게 앉아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아이들은 처음엔 나름 무섭기도 한 듯 머뭇거리며 여름이의 등에 살며시 손을 대어 보더니, 익숙해지자 아예 평상 위에 올라앉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예요?” “와, 엄청 부드럽다!” “나도 엄마한테 강아지 키우자고 했는데, 엄마가 자꾸 안 된대요.” “우와, 꼬리가 엄청 길어~” 


질문과 하소연(주로 엄마가 개를 못 키우게 한다는 것에 대한)을 20문장쯤 뱉어냈으니 슬슬 주차해둔 킥보드를 타고 떠날 때가 됐는데, 아이들은 여름이에게 푹 빠져 헤어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앉아 있던 여름이는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아이들이 여름이를 만지고 있으면 혹시 몰라 나도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읽던 책도 마저 읽고 싶고 해서 그만 가라고 할까 어쩔까 속으로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그중 한 아이가 또 질문을 던졌다. 


“얘는 몇 살이에요?” 

“두 살이야.” 

“강아지는 몇 살까지 살아요?”

“글쎄, 한 열다섯 살?”


그러자 아이가 허어억, 하고 놀랐다. 15년이라는 수명이 예상보다 길어서인지 짧아서인지 몰라 적당한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이가 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아니야, 아직 13년 남았으니까 지금부터 슬퍼하면 안 돼.” 


강아지 수명이 생각보다 짧다는 데에 놀란 쪽이었던 모양이다. 10년 넘게 남은 강아지의 죽음에 미리 안타까워하는 이 아이는 몇 살인가 했더니, 10살이었다. 15년의 수명을 선뜻 가늠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닐 텐데도, 개의 수명이 사람보다 짧다는 데에 미리 슬퍼하는 마음이 기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조금 더 여름이를 만지작거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100살 넘게 살면 좋을 텐데.” 


아이는 이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강아지도 조금 더 오래 살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나보다 오래 살면 곤란해, 내가 강아지가 떠나는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고 책임져야 하니까.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동물을 키운다는 건 결국 그 동물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그 예정된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그 아이도 한참 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아이의 부모님이 언젠가 결국 강아지를 키우는 데 동의한다면, 혹은 성장하여 독립한 뒤에도 여전히 강아지를 좋아해서 키우게 된다면 말이다. 



겨우 두 살인데도 남은 수명이 짧게 느껴지는 여름이는 사실 우리 집에서 가장 어린 동물이다. 나머지 세 고양이는 길고양이나 유기묘 출신이라 정확한 나이를 모르지만, 우리 집에서 산 지 6년이 되었으니 고양이 나이로 따지면 슬슬 중년일 것이다. 30대 중반이 된 내 나이를 떠올리면 항상 20대 후반쯤에 멈춰져 있는 것처럼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데, 나는 고양이의 나이도 항상 두세 살에 멈춰져 있는 것 같아 연도를 따져 숫자를 헤아리다 보면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싶어 놀라게 된다. 


아직은 이별의 순간까지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문득 아이들에게 남은 수명을 떠올려보면 아득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미 몇 년 전 15년을 함께 산 강아지를 무지개다리 너머로 떠나보내며 이별한 적이 있고, 그 기억은 아직도 때로 울컥 무너질 만큼 마음을 헤집는다. 네 마리 반려동물과 함께 살면서 앞으로 그 일을 네 차례나 더 반복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 순간에 대해 깊게 생각하다 보면 깊은 수렁에 끝도 없이 빨려드는 듯해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상상을 털어내기도 한다. 


말마따나 100년 넘게 살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고, 반려동물은 짧고 한정된 삶을 보호자에게 완전히 맡기고 있다. 가족이라는 게 그렇듯 누군가의 생을 대부분 함께하다 보면 무뎌진 일상이 되기 마련인데, 그게 끝나는 순간에야 우리는 매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시간이었는지 알게 되는 것 같다. 그걸 깨달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헤어짐 뒤의 슬픔을 짐작하기보다 곁에 있을 때 더 사랑하는 것뿐이다. 



동물을 키우기로 결정하는 건 끝이 있는 만남을 시작하는 일이고, 그건 연애의 경우에는 어리석은 시간 낭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함께한 시간이 충분히 빛난다면 아예 의미 없는 일이라고만 할 수도 없지 않을까. 함께한 시간이 행복했기에 헤어짐도 그만큼 슬픔의 무게를 갖는 것이니까. 어디선가 듣기로 동물들의 시간 개념은 늘 현재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어쩌면 보호자도 마찬가지로 동물과 함께할 때는 늘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것 같다. 


결국 여름이를 한참 조물딱거리던 아이들은 퇴근하는 남편이 합류하여 우리가 집에 들어올 때에야 여름이에게 아쉬운 인사를 하고 떠났다. 책은 끝내 마저 읽지 못했고 조금 귀찮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100살까지 살면 좋을 텐데’라는 순수하고 따뜻한 말은 오랫동안 귓가에 남았다. 



글쓴이. 박은지

© 동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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