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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 딱 두 시간 동안 관람하기

- 7박 8일 서유럽여행 (23/25)


17 NOV 2008


일곱 번째 날 아침, 에펠탑에 선착순으로 달려간 셈이다.    


호텔에서 짐을 다 빼고는 공항으로 떠날 채비까지 마친 아침, 야경으로 보았던 에펠에 오르기 위해 에펠탑 밑에서 줄을 섰다. 여행객들에게 예외 없이 줄을 세우는 대표 관광지 에펠탑. 1시간 정도의 줄이면 그나마 양호했다고들 하는데, 그 한국인들의 부지런함은 에펠탑에서도 발휘되어 줄 서기 시간이 10분으로 단축되었다.      


에펠탑에 오르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두 번  검사받는다. 엘리베이터를 두 번 탄다는 얘기인데, 처음 입장할 때 한 귀퉁이를 잘라내고 갈아탈 때 한 귀퉁이를 잘라내면. 입장권은 뾰족한 탑 모양을 이룬다. 이 모양이 또한 에펠탑의 여행 묘미.


처음부터 친절하게 대신 귀퉁이를 모두 잘라낸 여행객들이 종종 있나 보다. 그럴 때 다시 처음 줄 서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그야말로 지역규칙인 '에펠탑의 입장법칙'


오르는 것만도 장관인데, 막상 오르고 나니 눈에 걸리는 것이 없어 허전하기까지


유난히 파리의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진다. 우리나라 서울의 위도는 37 °34′, 파리의 위도는 48 °58. 지리적으로 파리가 훨씬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니 그림자가 서울의 그것보다 훨씬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 선글라스가 일상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오에 햇빛이 머리를 지나기보다는 눈앞을 지난다고 생각하면 그 눈을 향한 햇빛을 피하기 위해서 선글라스가 필수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역사적인 장소에 가면 생리현상이 발동하는 것이 내 습성이다. 화장실에 변기에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달걀 모양의 군더더기 없는 소변기가 아주 인상적이지 않는가?


파리는 서울에서 서북쪽으로 약 2만 2천500리 떨어져 있다.


서울까지 8,991km 직선거리를 알리고 있다. 동화책 '엄마 찾아 삼만리'가 얼마나 먼 거리인지 실감이 가는 대목이다. 파리는 날씨 때문에 더욱더 낭만적이라는 얘기를 한단다. 일 년 해 밝은 날이 100일이 될까 말까 한단다. 그러니 버버리 코트가 런던이건 파리이건 유행할  수밖에 없고... 아무튼 내가 갔던 날은 멀리 '

몽마르트르(Montmartre: 순교자의 언덕. 해발 130m) '언덕에 있는 '사크르퀘르 사원 (Basilique du Sacre-Coeur)'까지 200mm 렌즈에 커다랗게 잡히는 참으로 좋은 날씨를 보였다.


아래로 서울의 여의도 같은 격인 센강 한복판에 있는 '시테 섬(le de la Cité. 파리의 발현지)'에 있는 '

노트르담 대성당 (Cathédrale Notre-Dame. http://www.notredamedeparis.fr)까지 충분히 시야에 들어왔다.


융프라우에서도 파리에서도 날씨만큼은 그야말로 천금처럼 행운으로 이끌어 주었다.


에펠을 나와서 곧바로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 큰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는데 얼마나 걸립니까?" "두 시간이면 됩니다."


파리의 한 복판에 문화대국 프랑스의 자존심 '루브르 박물관 (Musee du Louvre)'을 불과 두 시간에 다 본다는 것이 과연 합당한 말인가? 한 파리에서 자칭 예술가로 활동하고 계신다는 분의 말인즉슨, 두 시간이면 인간이 맑은 판단과 지각으로 예술품을 볼 수 있는 한계 시간이라는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과학적 근거를 통해서, 시간 바쁜 여행객의 불안한 시간 조급증에 이해를 더해 주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원래 파리를 방어하기 위한 요새였다고 한다.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루브르 박물관의 건축 기본 목적이 이렇게 전쟁처럼 살벌했었다. 그런데 이 건물이 완공된 시기는 지난 13세기. 이후 왕궁으로도 쓰였다고 박물관으로 바뀌었고. 나폴레옹이 원정국에서 약탈한 예술품들로 채워감과 동시에 대대적인 매입을 병행해, 예술품이 가득가득 차게 된 것이라고 한다.


제대로 관람하려면 일주일이건 일 년 이건 기한이 없다는 루브르. 그저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 발길을 촘촘히 쉬지 않고 움직이며 시선은 원근의 조절 속도를 높이고 카메라 셔터에 올려진 검지 손은 좀처럼 껌을 붙여 놓은 듯 차마 뗄 수 없이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나오는 곳을 몰라서 줄을 잃으면 곤란한 곳. 거기에 '드농(Denon)', '리슐리(Richelieu)' 그리고 '슐리(Sully)'로 나뉘어 방문객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는 곳. 또한, 완벽하게 이 박물관을 안내할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 등등의 불편함은 있지만, 교과서에서 보았던 그 그림과 조각품과 유물을 볼 수 있다는 설렘이 관람을 마치는 동안까지 가득했다. 물론 이곳도 긴말로 설명하면 할수록 체면이 깎이는 곳이라서 가능한 많은 사진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루브르는 문화재 약탈의 현장. 프랑스는 약탈물로 관광산업을 하는 셈이고…


아름다운 예술품들이 한 곳에 모아놓으려는 나폴레옹의 뜻에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랐을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도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 문서를 약탈당했던 역사가 있다.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당시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정책의 일환으로 천주교를 탄압하였고 그 과정에서 국법을 어긴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 9명을 처형하였다. 프랑스는 즉시 극동함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공격하였으며 그것이 1866년의 병인양요이다. 당시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를 침범하여 인명을 살상하고, 왕실보유의 은덩이를 약탈하였으며, 당시 왕립도서관이던 외규장각을 불태워 4,700여 권의 도서를 없앴으며, 나머지 300여 권의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 갔다. 이러한 약탈과 방화는 당시 프랑스 침입군의 수장이던 로즈 제독이 프랑스 해군성 장관에 보낸 문서에 의해 명백하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1992년부터 프랑스 정부에 대한 도서 반환 요구가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의 고속전철사업 참여에 혈안이 된 프랑스는 자국 회사인 TGV가 타국과의 경쟁에서 유리하도록 하기 위해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직접 방문하여 영구임대방식의 도서 반환을 약속하였다. 1993년 미테랑 대통령은 도서 2권을 가져와서 그중 1권 만을 한국에 두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2000년 10월 19일 김대중-시라크 양국 대통령은 한불 정상회담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우리 문화재와 맞교환(등가 교류 대여)하는 방식으로 돌려받기로 합의했다. 참고로 영구 임대는 외규장각 도서의 소유권은 프랑스가 갖는 대신에 우리나라에 영원히 빌려주는 방식이고, 등가교류 대여는 외규장각 도서와 비슷한 가치를 지닌 국내 문화재와 맞교환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쉽게 돌아올 수 있는 문화재는 단연코 "없다." 그렇다고 결코 포기 못할 일! 

이탈리아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상이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그리고 '밀로의 비너스(Vénus de Milo)'는 그리스에서 약탈한 것이다. 거기에 '니케(Nike) 상'도 그리스'에서 약탈한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유적이 약탈당하여 한 곳에 모여져 있다. 루브르는 약탈의 본산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영국이 대영박물관이 예외가 아닐 것이 분명하게 예상된다.


이곳을 관람하고 나오는 심경이 한 편으로는 거장들의 예술혼에 감명을 받았다면, 도둑이 훔쳐온 물건들을 돈 주고 본 기분에 씁쓸한 입맛을 지울 수 없었다.


쓴 입맛을 달래려 일곱 번째 날 여행 '달팽이 요리' 점심으로 다음 글을 이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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