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 의도치 않게 인간관계가 박살 난 적이 있다.
그 지독한 전염병의 저주였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질긴 병이 가져다준 불안과 우울에 오랫동안 시달려야 했고 그로 인해 극도로 예민하고 날카로워졌을 것이다.
그 이유였든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든 간에 그 시기에 난 혼자가 되었고 남들보다 조금 더 외로움과 우울을 앓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이자 삶의 목적인 것처럼 인간관계에 올인했었다.
마치 내 주변은 마르지 않은 '인간 샘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음만 먹으면 오늘 하루 당장 약속을 여러 개 잡을 수 있었다.
좋은 점도 많았다. 항상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릴 수 있었으며 심심할 틈이 없었고 나의 매일은 재밌는 이벤트들의 연속이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면 언제든 내 손 잡아줄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그 시절이 좋았다... 하지만 그 시절 난 꼭 배워야 할 것을 놓쳤다.
그건 바로 '혼자 있는 행복'이다.
그때의 난 '함께 있는 즐거움'을 배웠다. 아니 너무 즐거운 나머지 독이 되었다.
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맹목적으로 즐거움을 쫒는 마냥 '즐거운 사람'일뿐이었다.
즐겁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은 변수 투성인 것이 함정이다.
사람이 있어서 즐거운 삶이란 '사람'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은 '변수'이다.
어느 날 멀리 떠나 버릴 수도 있고, 내 뒤통수를 칠 수도 있으며, 전염병 때문에 물리적으로 단절될 수도 있다.
주변에 사람들이 사라진다면 난 더 이상 즐거울 수 없었다.
혼자 있는 행복을 배우지 못한 나는 주변에 사람들이 사라져 버리자, 극심한 우울감에 시달렸고, 이 지독한 전염병이 조금 잠잠해질 즈음 하이에나처럼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한 번은 동네 도서관 강좌에 다닐 만한 수업이 있길래 '여기서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신청을 했었다.
수업에는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외모도 나이도 재 각각에 어떤 성격의 사람들인지 알 수 없었지만 평일 오전 시간대라 모두 주부들인 것만은 확실했다.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 2시간씩 10회 차 정도 되었는데, 이 짧은 시간에 서로에 대해 알고 자연스럽게 친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인데... 마음이 급했던 나는 3회 차 정도 되었을 때 몇몇 사람들에게 식사를 함께하기를 요청했다.(수업이 끝나고 마침 점심시간이었으므로)
어찌어찌 10회의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절반이 넘는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고 그중 몇몇은 종강 이후에도 따로 만날 정도로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억지스럽게 모은 이 친목은 얼마 가지 않아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모임의 핵심 멤버(?) 두 명이 알고 봤더니 사이비 종교의 일원이었고(어쩐지 친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집으로 초대해서 음식까지 대접하는 게 이상하긴 했다) 그동안 우리에게 보여줬던 다정함과 친절함은 사이비 종교로 끌어들이기 위한 빅 픽쳐였던 것이다. 나의 불순한(?) 의도로 만들어진 이 얄팍한 친분 모임은 이 충격적인 사실과 함께 허무하게 공중분해 되어 사라졌다.
이후 몇 번의 다른 모임에 속해 보려던 나의 억지스러운 노력은 모두 실패(유독 실패를 많이 하는 나...)로 돌아갔다.
내 주변이 왜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난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
관계를 만드는 것에 급급한, 혼자 있는 법을 모르는, 깊이 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철없고 의존성 강한 인간을!! 사람들은 다 알아본 것이다.
그러니 좋은 사람들은 날 피하게 되고 꿍꿍이를 가진 나쁜 사람들만 모여들었다.
인간관계에 쓸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난 그 후 오랫동안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함께 있는 즐거움 대신 '혼자 있는 행복'을 터득했다.
혼자 있는 행복을 알고 난 이후로 사람들에게 집착하는 '병'이 사라졌다.
더이 상 울리지 않는 카톡이나 전화 따위가 신경 쓰이지 않았고, 카페나 길거리에 혼자 있어도 삼삼오오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이 부럽거나 신경 쓰이지 않았다.
혼자 있는 행복을 알고 난 후 나의 인생은 예전보다 훨씬 성숙하고 깊이가 있고 여유로웠다.
나에 대해 알아 가고 조금씩 성장하는 과정이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작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나의 모든 에너지와 감각을 나에게만 집중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니 엄청 신나고 즐거운 하루는 아니지만 평화로운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몇 달이 더 흐른 후 내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올봄에 첫째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4월 경에 학교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학부모를 위한 독서 동아리 모집 문자였다.
'중학교도 이런 동아리가 있구나'하고 책을 좀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을 했다.
사람에 대한 욕심이 아닌 순수하게 독서를 하고 싶은 마음으로 신청했다.
첫 모임에서도 2주에 한 번 있는 그다음, 또 그다음 모임에서도 난 사람보다 책 읽기에 집중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고 쿨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모임이 끝나고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기도 하였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그런 활동들로 인해 '이 사람들이 나의 절친이 되어주겠지?' 하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사람들에게 썰렁하게 대한 것은 아니다.
난 워낙에 사람을 좋아하고 어울리는 것에 익숙했으므로 그 사람들을 대할 때는 진심을 다해 배려하며 나의 긍정에너지를 보냈다. 과하지 않게 잔잔하게 말이다.
그리고 수개월이 지난 지금 놀랍게도 '혼자 있는 행복'과 '사람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동안 나에게서 뿜어 나온 무시무시한 집착의 오오라가 사라지고 성숙하고 차분한 그리고 조금은 시크하고 인생을 해탈한 듯한 나의 에너지를 사람들은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나의 노력 없이도 그들은 나에게 다가와 준 것이다.
관계는 노력하면 할수록 망한다. 내가 나 자신과 가장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을 때 나와 비슷한 사람과 서로 집착이 없는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요즘은 집이나 카페에서 혼자 작업을 할 때, 바로 나답게 있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낀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그들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매번 배꼽이 빠질 만큼의) 큰 즐거움을 준다.
사람들에게 된통 상처를 받고 나서야 겨우 혼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다시 사람들 덕분에 인생이 즐겁기까지 하다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인생은 정말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힘들어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하루하루 잘 버티면 된다. 다시 좋은 날이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