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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프펜 Jan 26. 2024

기숙사의 이방인.

잠든 기억이 없는데 눈을 떠보니 아침이다. 내가 잠을 자긴 한 건가?

그러고 보니 여기는 어디지? 하려는 찰나 0.3초 만에 여기가 필리핀 세부의 어학교 기숙사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랬다. 나는 어제, 아니 오늘 새벽에 세부공항에서 낯선 이들의 손에 이끌려 이 학교에 들어왔다.

기숙사 방에 도착한 것은 새벽 3시 반을 훌쩍 넘긴 시간...

낯선 나라 낯선 학교의 낯선 방에 낯선 세명의 여자가 잠을 자고 있었다.

이곳 현지 안내자는 채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나를 이 방안에 밀어 넣고 사라졌다.

나는 불도 켜지 못하고 어떻게 잘 준비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잠을 이룰 수나 있을까.

심한 야맹증으로 어두운 곳에서는 앞을 전혀 볼 수 없던 나는 화장실이라고 생각되는 문 앞에 서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순간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망했다. 

기겁을 하고 급하게 불을 껐지만 이 낯선 룸메이트 중 누군가 깼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느낌으로 겨우 화장실 불을 찾아 켜고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심장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으로 조심조심 세수를 하고 어찌어찌 옷을 갈아입었다.


두 번째 미션은 어둠 속에서 나의 침대로 짐작되는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베드 4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는데 다행히 내 침대는 제일 안쪽 벽에 붙어있어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난 조심스레 침대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잠을 청해보았으나, 당연히 잠이 오지 않았다.

사실 중년이 되면서 밤에 잠이 잘 오지 않게 되었다. 중간에 깨기라도 하면 아침까지 거의 잠을 못 이룬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잠이 오는 것이 더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하다.

아침 일찍부터 입학시험이 예정되어 있어서 어차피 얼마 자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곤함이 몰려와서 잠을 자고 싶었다.

잠을 자고 싶은데 잠은 오지 않아 환장할 것 같은 심정이다.

이것이 오늘 새벽의 일이었다.


내가 있는 이 방은 총 4명이 사용하는 방으로 모두 다른 나라 사람들도 구성되어 있다고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공부하는 기간도 제각각이라 들어오는 시기도 나가는 시기도 모두 다르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이미 전부터 이 방의 주인이었으며, 내 침대는 어제까지 전 주인이 사용하던 것이었으리라. 즉 난 이들에게 낯선 이방인일 것이다.

지금 나는 또 다른 엄청난 난관에 부딪혔다.

눈은 떴지만 도통 일어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새벽, 내가 아무리 조용히 움직였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잠을 방해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민폐행동을 해놓고 뻔뻔하게 첫날부터 샤워실을 일등으로 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고민되는 것은 이 낯선 이들과의 첫 대면을 어떻게 해야 할지였다.

어느 나라사람들일까? 몇 살쯤 되었을까? 마주치게 되면 자연스럽게 영어로 인사를 해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헬로? 하이? 나이스튜미튜?

그사이 한 룸메이트의 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장 샤워실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이제 나도 일어나도 되었다.

그녀가 나오면 바로 이어 들어갈 심산으로 현관 앞에 둔 나의 여행가방에서 부랴부랴 옷가지를 꺼냈다.

 현관 바로 옆이 샤워실이었으므로 샤워실에서 나온 그녀와 나는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그녀는 키가 아주 큰 러시아 미녀였다. 

'헉 러시아인은 생각도 안 해봤는데...' 나는 예전에 일본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어서 내심 일본인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금발의 룸메는 속옷차림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나에게 먼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이, 웨얼아유프롬?' 

'아임 프롬 코... 코리아...'

우리의 대화를 들은 다른 학생들도 하나씩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인사를 해주었다.

'하이, 웨얼아유프롬?' 

'아임 코리안'

'웨얼아유프롬?' 

'아임 베트나민'

'아임 차이니즈'

나의 룸메들을 러시아, 베트남, 중국인들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은 뭔가 현실감이 무지 떨어지는데? 뭔가 글로벌하다....'

어색한 인사를 마치고 신기한 마음 반 긴장되는 마음반으로 샤워실로 들어갔다.

다행이다. 걱정했던 첫 대면은 이걸로 끝났다. 


이미 시험시간이 간당간당 했으므로 어떻게 준비를 마쳤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옷을 입고 얼굴에 뭔가를 찍어 바르고 뛰쳐나갔다. (20살이면 맨 얼굴도 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40대는 뭐라도 발라주는 것이 예의인 것이다)


아침이 되니 오늘 새벽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던 학교풍경이 잘 보였다.

필리핀 어학교치고 꽤 큰 규모의 이 학교는 700명의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부터 카페테라스 앞 라운지에는 수많은 학생들로 분볐다.

이른 아침을 먹는 학생들, 소파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 바쁘게 어딘가로 이동하는 학생들...

그 옆으로 큰 풀장도 보였다. 풀장 가장자리에는 열대나라답게 야자수로 둘러싸여 있었다.

뷰만 보면 학교가 아니라 휴양지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감상은 잠시, 나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시험장으로 향했다.

이제 슬슬 타국의 어학교에 온 실감이 들었다.

긴장되는 첫 시험... 과연 나의 레벨은 뭘까?


제발 꼴찌만 아니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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