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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 Mar 10. 2024

만년필의 쓸모를 오래전에 알았더라면

"뽈(뿔)개미가 기어가냐"

늙수그레한 곽주사는 내 글씨체를 보고는 재밌다는 듯 놀리곤 했다. 그는 면사무소에서 급사를 하다 글씨를 잘 써서 정식 면서기로 채용되었다고 한다. 글씨 잘 쓰는 것으로 면서기에 정식 채용된 건 대단한 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번은 그가 글씨 쓰는 걸 본 적 있었는데 한 자 한 자 붓글씨 쓰듯 아주 정성스러운 몸짓이었. 그는 글씨하나로 시대를 잘탄 케이스라 자신의 글씨에도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다.


반면 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글씨를 잘 쓰지 못한다는 못한다는 지적을 많이 들었다. 특히 그 시절 90년대 초는 지금처럼 컴퓨터가 나오지 않는 시대라 무조건 종이 기안문 용지에 펜으로 공문을 작성했어야 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글씨체도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우대를 받던 시절이었다. 실제로도 90년대 이전의 시골에서는 마을이장을 하다 곽주사처럼 공무원으로 특채된 경우가 많았다.


요즘은 글씨를 쓰지 못해도 모든 걸 컴퓨터로 하니 악필가들의 고민은 사라진 듯했다. 그러니 만년필이니 뭐니 하는 게 요즘 사람들의 흥미를 별로 끌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마 그 당시 만년필을 잘 활용했더라면 인생을 조금 더 편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글씨 못쓴다고 계장한테 혼나는 일로 없었을 것이고 그때부터 필사를 시작했더라면 놀라운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절을 보내고 컴퓨터가 나오고 전자문서가 등장하면서 더더욱 펜에 대한 필요 같은 건 더더욱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년필의 쓸모를 발견하게 되었다. 종이 위에 사각거리며 진하게 써 내려간 내 글씨가 종이 위에 선명하게 흔적을 남기는 모습에 빠지고 말았다. 하나의 같았다. 만년필로 쓰니 볼펜으로 쓴 것보다 더 천천히 쓰게 되니 자연스럽게 글씨가 정자로 써진다. 종이 위가 빙판이고 만년필의 촉은 스케이트 날 같았다. 확실히 9년 전 내가 만년필로 쓴 글씨와 현재의 글씨가 다르다. 확실히 글씨 개선의 효과는 있다.


왼쪽 2015년 ㅡ오른쪽 2024년

이 신기한 물건의 효능을 나만 알고 있기엔 아까웠다. 만년필 케이스에 담긴 펜들을 90년대 가방장수처럼 가지고 다니며 직원들에게 홍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기안문을 수기로 작성하지 않기에 만년필의 인기가 그리 없는 것 같다. 그래도 가만 보면 사무실에 숨은 악필들이 있다. 동지가 생긴 거 같아 반가운 마음이다. "우리가 만년필을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한 주제로 PT자료를 만들어 직원들에게 배포할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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