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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강연+자원봉사로 채워진 날들(3)

by 얼음마녀

33명의 멤버는 A, B1, B2, C 이렇게 네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C그룹이 첫 시험을 볼 때 인터뷰를 제일 잘한 사람들이고 나는 B1반이었다. 각자 시간표에 따라 그룹별로 강의실을 옮겨 다녔는데 거의 1층과 2층 정해진 강의실이었다. 4명의 강사가 각기 Current event, Conversation, Grammar, Writing 등의 과목을 맡았다. 그중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제임스 코다는 억양이 상당히 특이했다. 그동안 영어의 표준말만 들었다면 약간 우리로 말하면 사투리 같기도 했는데 생소했다. 우리의 반응을 보며 이해를 못한 것으로 알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해주기도 했다. 알다시피 한국인들은 리엑션에 약하다. 그들은 상대가 말할 때 장단을 맞추고 말끝마다 반응을 보여주는데 나이 든 우리 한국 학생들의 경우 딱딱한 공무원들인데다가 거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었으니 제임스는 우리가 이해 못한 것으로 여기고 여러 번 반복했고 나중엔 우리로부터 예스를 확인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의 주된 습관은 강의 시 들고 있던 펜을 귀에 꽂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주로 목수들이 귀에 펜을 꽂지 않았나 싶다. 그의 목소리는 다른 강사와 비교했을 때 유독 울림이 있었다.

그렇게 건강하게 보이고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던 40대 초반의 제임스에게도 힘든 시간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첫날 그가 보여준 영상에는 몇 년 전 펜실베이나 지방에 폭우로 주택 절반 이상이 잠긴 심각한 영상을 보여 주었다. 곧이어 목에 호스를 꼽고 몸을 하나 움직일 수 없고 옆에서 어머니의 요양을 받는 제임스의 모습이 보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앉지도 걷지도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길랭-바레 증후군에 걸렸던 것이다. 그건 원인모를 염증성 질환으로 말초신경과 뇌신경을 광범위하게 포함하여 나타나는 세계적인 병이고 30,40대에 나타난다고 한다. 지금은 완치된 모습이지만 그런 연유에서인지 그는 항상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고 하루하루의 삶을 성실하게 생활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를 보며 다시 한번 건강한 삶과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건강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근간이 되고 그로 인해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간이었다. 그의 목엔 아직도 흉터가 있지만 그는 그걸 애써 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닌다.

회화를 맡은 브라이언은 탁구를 좋아하고 강의 때 항상 반바지 차림으로 낮은 의자에 앉아서 강의를 한 게 인상적이었다. 미국에서 한 달 보낸 결과 브라이언처럼 구렛 수염을 기르고 반바지 차림의 미국인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반은 캐런의 수업은 듣지 않았지만 처음에 시험을 보고 연수과정 전반에 대해 설명을 한 것으로 보아 캐런이 이 연수과정의 책임자임을 알 수 있었다.


지루했던 수업은 영국출신의 벤 솔트의 파닉스 시간이었다. 나랑 같이 어울렸던 어떤 멤버는 다른 여타 강사들보다 벤 솔트의 수업에 가장 애착을 느꼈는데 집중하려고 하면 항상 내가 옆에서 하품을 하는 바람에 그녀가 불평을 했다. 벤 솔트는 나이가 상당한데도 미국에서 자녀를 대학까지 보내기까지 너무 많은 돈이 든다며 경제적으로 힘든지 모르겠지만 낳지 않고 살기로 했다고 하는데 미국의 생활이 풍요롭지만은 않구나 했다.

우리 숙소 로비 카운터엔 언제나 안내자가 상주하고 있어서 로비에 애선스 시 로컬 커피인 주황색 브랜드인 지터 리 커피가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채워두었다. 매일 아침을 간단히 먹고 그곳에 있는 종이컵에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학교까지 10분 정도 걸어가거나 개인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가지고 가는 게 하루 첫 일상이었다. 하루는 내가 커피를 포트에서 컵에 받고 있는 데 , 부지런한 젊은 여성교육생이 아침 일찍 걸어서 수영장 다녀오는 모습을 보고는 놀랐다. 가깝지 않은 거리를 그렇게 다니는 게 그나마 젊어서 체력이 받쳐주었기 때문이리라. 우리 33명이 하루에 커피를 엄청 마시는데 먹어도 먹어도 그들은 리필을 해줘야 하니 우리가 머무를 한 달 커피 소비량이 최고였으리라. 나는 그때 지터 리 조 커피가 유명하다는 걸 처음 알았고 학교 주변에도 지터 리 커피숍이 있었다.

사람만 다람쥐반의 초록 캠퍼스를 학생이 된 느낌으로 걸어갔다 보면 다람쥐들을 매우 근접한 위치에서 볼 수 있다. 한국 같으면 완전 주변이 난리 날 텐데 강사들은 다람쥐를 거의 생쥐 보듯 극도로 싫어하는 듯 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는데 5월의 미국은 너무도 더웠다. 거의 우리나라 한 7월 중순의 폭염을 느낄 정도였다. 숙소의 개인 침실에는 딱 침대 하나 티브이 하나 비치되어 있고 다른 공간은 없기에 조금 답답한 데다가 불빛은 어둡고 에어컨은 시원하지 않았다.

오후에 숙소로 돌아와 각자 점심을 끝내고 우리를 태우러 숙소 앞에 대기한 미니 봉고차 3대에 나누어 탑승한 후 강의 홀로 향한다. 오후 일정은 숙소에서 멀리 떨어진 '치코피 오디토리움'으로 가서 현지 조지아주 정부 및 애선스-클라트 카운티 정부로부터 기관 설명 및 다양한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저소득층 비율이 높은 게 조지아대 학생수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학교 강의를 들을 때처럼 우리를 배려해 천천히 말해주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들 일상 때 쓰는 말의 속도와 억양으로 말을 했는데 정말 들으려고 해도 그걸 전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우리 중엔 끝나고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고 한번 질문한 사람이 끝날 때까지 질문해서 수료할 땐 무슨 상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막상 미국 와서 한 달간 영어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초조해지고 몸도 처지기 시작하면서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 든 생각은 아니었으리라. 교육생들 얼굴에서 점점 지쳐가는 모습과 웃음이 사라지는 거 같았다. 일부 서로 친해진 사이끼리는 주말에 근처 레스토랑을 가거나 저녁에 모여 스테이크와 와인을 먹는 분위기였지만 남들과 어울리는 것에 서투른 나는 학교와 숙소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며 영어가 언제쯤 온전히 이해가 되고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올지 전전긍긍했던 시간이었다. 기회를 갖고 온 미국에서 그 어떤 호기심도 없이 오직 어떻게 영어 배워서 아무 거리낌 없이 술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을 한탓에 하루하루가 힘겹게 느껴지기만 했다. 5시나 6시에 모든 일정이 끝나 숙소에 돌아오면 항상 티브이를 뉴스 채널에 고정시켜두고 어떻게라도 하나라도 더 듣고 가려고 했다. 영어는투자한 시간 대비해 결과가 나오는데 마음만 앞선 날들이었다.

오후에 오디토리움에서 하는 강연을 듣고나면 하루가 마무리된 줄 알지만 끝난게 아니다. 어떤 날은 당초 한국서 신청했던 자원봉사 프로그램 순번이 돌아와 캠퍼스 키친이라는 노인 요양원의 주방에서 같이 음식을 조리하는 자원봉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사교클럽인 토스터 마스터에 참여를 했고 주말에는 저소득층 집수리사업, 푸드마켓 식품 포장 자원봉사를 했다. 키친 봉사할 때 그곳에서 일하는 스텝이 절반은 한국인 피가 흐르고 있어서 엄청 반가웠다. 엄마는 한국서 간호사였고 아빠는 미군이었고 여섯 살 때까지 한국에 살았다고 한다. 현재 애틀란타에 살고 있다고 했는데 미소가 엄청 예뻤다. 한국에서 호기심에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은 의욕에 너무 많은걸 신청해서 영어로 지치고 봉사까지 하고 지쳤기에 괜한 욕심을 부렸구나 후회를 하기 시작했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나 하고 다들 열심히 참여했다. 전 국민 절반 이상이 자원봉사하는 미국인지라 우리 외에 일반인들도 자원봉사를 하려고 줄을 지어 왔고 일반인과 함께 우리는 저소득가정의 아동에게 배달되는 기부식품을 포장했다.(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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