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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

헌법 제10조

by 한량돈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잘못투성이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저는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렇게 말까지 했을 것입니다.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알았습니다. 광주에 가서 마음으로라도 사죄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처음 광주에 간 건 15년 전 5월 19일 ‘2010 광주 아시아 포럼’에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의 제정 경과와 쟁점 그리고 전망’이라는 글을 발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5월 26일에는 ‘5․18 민중항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한국 사회와 인권: 헌법 연구자의 시선’이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의 작성에 참여한 것은 학창 시절 제가 체벌을 당한 것보다는 체벌당하는 친구를 보고 침묵하고 방관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리고 헌법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학생 인권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그 학창 시절의 비겁자로 머물러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의 계기는 2013년 <‘기지촌 여성 지원 등에 관한 특별법(안)’: 기지촌 여성의 삶과 국가의 책임을 묻다>라는 주제의 국회 공청회에서의 생각이었습니다. 주한미군 기지촌에는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70년대의 박정희 정권은 외화 획득을 위해 기지촌 여성들을 이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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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초등학교 시절 살던 지역에도 미군기지가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양공주’, ‘양××’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성매매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공청회의 발표자 박정미 박사에 따르면, 국가는 성병을 군사력의 손실로 인식하여 엄격하게 성병을 통제하려 했고, 그에 따라 한국 정부가 군경을 동원해 성병을 검진했다고 합니다. 하주희 변호사는 이들 여성에 대한 국가 지원 법안을 설명했습니다. 그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 승소했습니다.


보통 국가폭력 사건이 그렇듯이 소송으로 가게 되면, 제일 큰 걸림돌이 소멸시효입니다. 법이 정한 일정 기간 내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소송할 자격과 권리를 잃습니다. 토론자로 참여한 저는 제가 법 연구자로서 책에서 배운 대로 소멸시효를 말할 거면 이분들이 나를 부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게 주어진 소명은 국가 기지촌 여성들에게 관련 입법을 해서 생계를 지원해야 하는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문제와 해법은 책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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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들의 얘기를 듣고 그것이 헌법적으로 문제가 되는지 판단하고 그에 따라 법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게 저의 임무였습니다. 시민사회에서 제기하는 헌법적 문제들을 중심으로 저의 공부 방향이 바뀐 것도 그때부터입니다. 텍스트(문자, text) 만능주의 또는 텍스트 지상주의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진실을 상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을 글 또는 말로 재현하는 게 제게 정말 필요한 헌법의 공부 방법이었습니다.


올해 세월호 참사 11주기 4월 연극제에서 지정남 배우의 <환생굿>을 4월 20일(일) 경기도미술관에서 관람했습니다. 지 배우는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환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굿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씻김굿’을 ‘원데이 클래스’라도 배우고 싶은 것은 ‘망자의 천도를 위한 굿’이라는 본래 의미에서라기보다 ‘나의 죄책을 씻어내고 싶은 바람’입니다. 5월 10일(토)과 11일(일) 광주에서 ‘지전춤’ 강습에 참여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헌법 조문은 간략하고 추상적입니다. 헌법 조문을 읽으면서 구체적인 상황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에 헌법 조항을 해석하여 적용하는 일에서 텍스트를 그대로 읽는 것은 매우 관념적이기 쉽습니다. 춤은 제 몸짓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뻣뻣한 몸을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게 만들어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제가 꿈꾸는 대로 제 몸을 움직여 가야 합니다. 저의 몸과 감정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관객 등을 입체적으로 그려내야 합니다. 저의 헌법 공부 또한 그렇습니다.


저는 헌법에 농축된 역사와 정치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세상과 그에 따른 규범을 풀어내야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든, 광주 민중항쟁에 참여한 시민들, 미군 기지촌 여성들, 인권을 온전하게 보장받지 못한 학생들이 인권을 침해받아 과거에 죽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미래에도 그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무심코 제가 내뱉었던 말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고, 더욱이 제 기억에는 또렷이 남았습니다. 그 기억을 지울 수 없지만, 헌법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함부로 말한 죄책을 씻는 일이 무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은 인간 존재 자체의 존엄함을 말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존엄을 지키고 회복하려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존엄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존엄은 과거 부정의와 불법에 대한 반성과 정의 회복을 통해 실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유엔총회에서 채택한 ‘인권 피해자 권리장전’은 대규모 인권침해를 겪은 사회가 구현해야 할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 내용은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 규명, 가해자의 처벌과 징계,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원상회복, 치유와 재활 조치,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개혁과 공직자·언론종사자·공공기관종사자 등에 대한 인권 교육, 시민에 대한 일반적인 인권 교육을 포함한 피해자 요구에 대한 충족과 인권침해에 대한 사죄 등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형사처벌이나 금전배상과 같은 법적 수단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적극적인 정치적 열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증진하는 사회가 되려면 시민들의 정치적이고 정신적인 변화와 정치․경제․사회․문화 제도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개헌의 내용이자 방식입니다. 헌법 조항을 고치는 일은 다음 문제입니다.


* 제가 ‘브런치 스토리’에 익숙지 않아 ‘브런치북’ 작성 방법을 찾지 못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글을 이미 5월 18일에 써서 공개했습니다. 2025년 5월 18일은 ‘5․18 광주민중항쟁’ 45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그때부터 연재를 하고 싶었거든요. 비록 ‘헌법방랑기(憲法方浪記)’는 5월 25일부터지만, 지난주 5월 18일부터 시작한 것으로 여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이 일요일이어서 일요일로 연재일을 선택했습니다. 시간은 오후 4시 과잉 진압의 시작 시점입니다.


** 위의 영상은 Adobe Stock을 통해 라이선스를 얻었습니다.

Aerial View of Former Provincial Government Building, Gwangju 5·18 Historic Site, South Korea 광주 518 사적지 구도청, 제작자 Info, 치수 3840 x 2160px, 파일 유형 MOV, 코덱 hevc, 비트율 32.323 Mbps, 재생 시간 00:16, 프레임 속도 30, 파일 크기 61.67 MB, 라이선스 유형 강화


*** [憲法方浪] ‘헌법방랑’ 프로젝트는 헌법 방법론을 탐구하여 유랑하는 프로젝트로서 통상적인 ‘放浪’과 달리 방법론의 유랑이라는 점에서 ‘方浪’이라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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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