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만 기다리면 된다."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지만, 시간은 무참히 늘어졌다.
5분은커녕 20분, 아니 1시간이 흐른 듯했다.
이곳은 느린 나라다.
한국처럼 빠른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구급차가 도착하길 기다리는 동안 가끔씩 모래 위에서 허공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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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은 파도처럼 몰려왔다.
규칙적이지 않았다.
가끔 잔잔하다가도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고통이 온몸을 찢는 듯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이라 정리가 되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생각하려 해도 그런 사치는 허락되지 않았다.
꿈만 같고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몸의 통증이 이것이 현실임을 계속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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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깊고 느린 숨을 쉬어야 한다.'
그것도 내 생각이 아니었다.
본능의 명령이었다.
내 안에 있는 더 깊은 존재의 행위 같았다.
자유의지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내 안의 놀라운 생명력이 자동으로 작동하는 듯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한 것은 딱 하나였다.
이 흐름을 따라야겠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눈을 뜨지 말자는 것.
환상이 심하게 나타났기에 계속 눈을 뜨다가는 정신을 잃고 죽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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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해야 했다.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평정심을 유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눈을 감고 심호흡하며 의식을 끊임없이 붙들었다.
하지만 통증이 한 차례 몰아친 후, 나는 다시 눈을 떴다.
그 순간, 세상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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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석증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다.
세상이 빙빙 돌고 천장이 무너질 듯, 땅이 솟아나는 듯 정신이 없었다.
균형감각이 마비되어 구토하며 중심을 잡지 못해 괴로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느낌보다 백 배는 강했다.
빛이 소용돌이치듯 세상을 휘감고 있었다.
끊임없이 움직였다.
마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같았지만, 그 강렬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하늘에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것이 그랬다.
세상과 나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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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알아챘다.
이것이 더 이상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본 것이 현실인지 초현실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모든 것이 내 마지막 순간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눈을 감고 조용히 호흡했다.
'아프다'거나 '죽는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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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환청처럼 느껴졌다.
내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는 그 소리는 처음엔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그 울림은 분명 **구급차**였다.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의식을 잃는 순간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승에서 나를 부르는 손짓 같은 환상들.
더 이상 그런 것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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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음이 가까워지면 섬망 현상을 겪는다고 한다.
저승사자가 왔다느니, 이상한 사람이 보인다느니 하는 헛소리 말이다.
내가 지금 그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 같았다.
저승사자는 아니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으로 만들어진 형체들과 파장들이 이 세상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신호는 차원을 넘나들 때 보이는 시그널이 아닐까?
이번만큼은 사이렌 소리가 착각이 아니었다.
나를 구하러 오는 구원의 소리였다.
의식이 다시 흐려졌다.
깨어있다가 잠들기를 짧은 주기로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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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오는 통증이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앰뷸런스가 도착하자 구급대원들이 급히 내려와 내 상태를 확인했다.
그들이 내 몸을 들것에 옮기려는 순간,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아아악!"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내가 지른 외침이 파도 소리와 뒤섞여 해변에 퍼졌다.
내 몸은 천 조각으로 찢어지는 듯했다.
구급대원들의 손길은 조심스러웠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에게는 작은 움직임조차 극한의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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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어린 표정으로 구급대원들과 소통하려 애썼다.
언어가 달라 한계가 있었지만, 몸짓과 표정으로 다급함을 전하고 있었다.
내가 통증에 힘겨워하자 그녀가 물었다.
"소지품이 어디 있어요?"
정신이 없었지만 가방이 근처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거 소지품이에요! 꼭 같이 가야 해요!"
내 삶을 구원해준 세 번째 역할이 바로 이 가방이었다.
물론 그때는 몰랐지만.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구급차에 가방이 옮겨지는 것을 보았다.
그 작은 가방 하나가 내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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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것 위에서 흔들리던 내 몸은 구급차에 실리자 조금이나마 안정감을 찾았다.
하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움직일 때마다 차오르는 아픔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내 이송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구급차가 요란하게 출발하며 모래 해변을 빠져나가는 순간,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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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사라졌다.
눈을 감아도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고, 눈을 떠도 환상이 시작되었다.
때로는 현실과 환상이 함께 공존하기도 했다.
환상이 시작될 때마다 눈을 감았지만 소용없으면 반대로 눈을 떴다.
구급차 창문 밖으로 하늘과 건물, 그리고 야자수가 보였다.
파란 하늘이 온통 무지개색 물감을 칠해 놓은 듯 황금빛과 섞여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베트남 낫짱에서 눈이 올 리 없는데.
함박눈처럼 조용히 빛송이가 떨어졌다.
세상은 더욱 황금빛으로 변해갔고, 어느새 구급차 안에도 눈발인지 빛 가닥이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다.
더 큰 눈보라가 아니 무한대의 빛이 내 몸에도 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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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안온하고 평온했다.
내가 만약 아기였을 때를 기억한다면, 엄마 품속에서 젖을 물고 자고 있는 그런 정도의 평안함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느껴본 적이 없는 안도감이었다.
눈 같은 빛이 차갑지도 않을뿐더러 따뜻하게 나를 지켜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현상이 계속 발생하기에 이제 정신을 차리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편안하기도 했고, 더 이상 그런 노력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눈발은 보였다.
눈을 뜨나 감으나 따스한 눈이 내 몸에 닿으면 피부를 타고 몸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놀랍기도 했고 편안하기도 했다.
그저 이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내가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누군가 제3자가 이것을 보고 느끼는 그런 느낌.
거기에 이름으로 불리는 나는 아주 작은 엑스트라 같았다.
주연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는 엑스트라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되어 있었다.
관객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내가 그 연극에 출연하고 있으며 상황을 보고 있는 이상한 존재가 겹쳐서 나타났다.
내가 주도권을 갖고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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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실 같은 상황에서 눈을 뜨고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내가 보고자 하면 이상하리만큼 밖이 잘 보였다.
구급차가 투명도 아닌데 그 외부가 그냥 보였다.
상상력이 과하다고 할 수도 있다.
건물과 나무들과 하늘이 합창을 하듯 하나로 연결되어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내 몸과 주변 풍경이 이제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를 위해 빛의 왈츠를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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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동이 트고 있어서 햇빛이 다채로운 광선을 주변에 뿌리고 내 시신경과 뇌는 피 공급이 부족해서 그 빛을 붙들기 위해 여러 가지 색채로 그 태양광을 해석할 수도 있었을 거라 추측해본다.
인체의 신기한 능력이 작동했을 것이다.
뇌가 위기 상태에서 스스로 살기 위한 마지막 발악을 스스로 한 것이라 생각해본다.
지금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경험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내가 이론적으로 설명할 길이 부족할 뿐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동시에 존재하는 와중에 구급차는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다.
내가 상상하던 병원이 아니었다.
문턱을 넘자마자 눈에 들어온 풍경은 충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