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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Oct 26. 2022

사람이 스무살에 죽는다면

2-6. 우리 마을에 시간을 좀 더 줄 수는 없을까

김씨처럼 내가 사는 동네를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들려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주민자치회나 입주자대표회의 같은 마을 조직은 스스로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주민 없이는 굴러가지 않습니다. 그 관심과 애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저마다 다른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대부분 분명히 드러나는 공통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 동네에서 오래 산 사람들이며, 앞으로도 오래 살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란 점입니다. 김씨가 임명한 골목대장들도 역시 60~80대로 대체로 나이가 많으며, 이들이 다산동에 거주한 기간이 최소 20년 이상에서 평생에 이른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한 동네에서 이렇게 오래 산 사람들이 뭔가 해보기 위해 힘을 합친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사는 동네에 갖는 애정은 대체로 그곳에 산 시간만큼 커지기 마련인데, 세상은 그리 긴 시간을 좀체 허락하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나이를 먹은 동네는 고사하고, 20년만 지나도 '노후하다'는 판단을 내려버립니다. 예를 들어, 다산동에는 법적으로 '노후·불량 건축물'이 70%가 넘는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노후·불량'의 기준은 얼마나 될까요? 재개발의 근간이 되는 법령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의 시행령은 그 기준을 20년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면서 노후도를 평가할 때 그 지역에 20년 이상 된 건축물이 3분의 2 이상 있는지를 주요하게 따집니다. 건물이 정말 20년이 넘으면 노후하고 불량해지는 걸까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100년이 넘어도 구조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적 기준은 '20년'입니다.


그래서 어디든 다산동처럼 20년 이상 된 건축물이 그 비율을 넘어가면 재개발을 추동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들썩이게 되어있으며, 그 순간부터 그 동네는 곧 헐릴지도 모를 대상이 되기 때문에 눈에 띄게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세 들어 살거나 장사하려는 사람들이 유입되지 않으며, 원래 있던 사람들마저도 떠나버립니다. 사람은 스무살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출발선에 서는데, 사람이 사는 동네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생각합니다.

ⓒSava Bobov(https://unsplash.com/)

저는 김씨가 재개발을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개발이 언제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주민들이 조금만 신경 쓰면 바꿀 수 있는 게 많아요." 재개발은 이렇게 잠재되어 있는 주민들의 열정과 헌신을 말끔히 제거합니다. 20~30년마다 부수고 다시 세우는 동네에서는 결코 골목대장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앞서 재개발 후 원주민 재정착률이 10% 안팎에 그친 사례를 이야기했습니다. 재개발은 집과 땅의 모양뿐만 아니라 살던 사람들까지 통째로 들어냅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김씨 같은 동네 주민 몇몇이 골목을 가꾸는 모습이 시시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동네의 오래된 사람들의 가능성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주민들을 협동조합으로 조직해서 동네 청소를 사업으로 발전시킨 곳도 있습니다.1) 이런 협동조합을 '도시재생기업(CRC·Community Regeneration Corporation)' 또는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이라고 부릅니다. 이 협동조합들은 처음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한 시설과 예산을 밑천 삼아 주민들이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지만, 종국에는 주민 조합원들이 낸 출자금을 바탕으로 투자와 수익을 순환시키며 자립하는 걸 목표로 삼습니다. 사업 영역은 개척하기 나름입니다. 낡은 지역이 공통적으로 앓는 문제인 청소·집수리나 노후시설 관리·활용에 나설 수도 있고, 육아 등 돌봄 노동을 공유할 수도 있습니다. 식당·카페나 주점 같은 작은 가게를 열기도 하고, 공예나 IT기술을 가진 주민이 다른 주민을 상대로 강의하는 문화센터를 운영할 수도 있습니다.


본보기가 되는 프랑스의 지역관리기업(Régie de quartier)은 프랑스 전역에 133개가 있고 약 9000여명을 고용한다고 합니다. 공적임대주택의 하나인 사회주택을 기반으로 청소, 건물 유지관리, 녹지 관리, 공사 같은 사업을 펼치는 사례들이 있습니다.2) 18~19세기 혁명기에 주민 자치 조직인 '코뮌(Commune)'3)을 꾸린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료: 도시재생종합정보체계(https://www.city.go.kr/), 서울특별시 도시재생지원센터(https://surc.or.kr/)

이렇게 주민들이 회사를 차려서라도 지역경제를 한 번 살려보고자 하는 곳도 있는데, 현존하는 지역경제 기반을 재개발로 허무는 행태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더 보태야 할까요. 아까 둘러본 창신동에는 서민들이 사는 집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터인 소규모 봉제공장이 빼곡합니다. 창신동에서 가까운 동대문 일대는 아시다시피 '패션타운'이라고 불리는 의류 유통·판매의 중심지입니다. 지하철 2, 4, 5호선이 겹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부터 '굿모닝시티', '헬로APM', '밀리오레', '두타몰', '현대아웃렛' 등 의류 도소매점이 밀집한 건물들이 들어서 그 안에서 상권의 흥망성쇠가 다소 있을지언정 여전히 명맥을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맞은편에는 2014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문을 열어 국제적 패션쇼 유치나 온라인 상거래를 위한 시설·기구 대여, 청년 디자이너를 위한 의류 제조 장비 제공 등 패션산업을 지원하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아웃렛에는 청년들이 선호하는 패션 브랜드 '무신사'가 청년 디자이너들을 위한 공유 오피스 '무신사 스튜디오'를 세웠을 정도로 패션업계의 새로운 세대 역시 동대문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창신동은 이런 동대문 업계의 하청을 수행하는 '배후 생산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신동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옷 하나 만들면 퀵이 15번 온다." 1970년대부터 봉제공장들이 창신동으로 유입되지 시작했는데, 이들은 빠른 생산을 위해 공정별로 분업하는 소규모 가내수공업 형태를 갖추게 됐다고 합니다. 패턴(옷의 디자인에 맞게 본을 만드는 작업), 재단·재봉, 마도메(안감·주머니·단추 등을 다는 부자재 작업), 시야게(다림질·포장 등 납품용 완성품 작업)를 각각 전문으로 담당하는 공장들이 골목마다 포진하고 있습니다. 한창 많을 때는 3000여개까지 됐다가 서서히 줄었는데, 재개발 논의가 오가던 2014년쯤에도 1000여개는 됐다고 합니다.4) 골목에서는 오토바이 달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한 공장에서 작업을 마친 의류를 다른 공장으로 날라야 다음 공정을 진행할 수 있는데, 이 운반 작업을 퀵서비스 기사들이 맡는 것입니다. 오토바이는 봉제업체만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다. 봉제 노동자들이 주문한 식사를 나르는 오토바이들도 분주하게 다닙니다. '옷 한 벌에 퀵 15번'은 한 동네에서 촘촘하게 얽힌 '산업 생태계'를 나타냅니다.

창신동 봉제공장 분포도. ⓒ<창신동; 공간과 일상>(2011), 99쪽

생태계 안에서는 어느 것 하나 외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풀-메뚜기-쥐-올빼미'에서 하나를 들어내면 반드시 생태계는 이상신호를 울립니다. 메뚜기가 사라지면 당장은 쥐가, 나중에는 올빼미 역시 곤란해질 것이고, 올빼미가 사라지면 쥐가 지나치게 늘어나면서 풀과 메뚜기가 곤란을 겪을 것입니다. 산업 생태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패턴-재단·재봉-마도메-시야게'에서 어느 것 하나를 들어내면 옷을 동대문에 보낼 수 없게 되고, 그럼 창신동의 봉제 생태계가 통째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창신·숭인 재정비촉진지구' 같은 재개발 계획을 짠 행정가와 개발업자들은 이 생태계의 존속 문제는 전혀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냥 재개발 구역 한편에 새로 건물 한 채를 짓고 그 안에 봉제업체들을 다 몰아넣겠다는 식의 계획만 나왔는데, 그 규모가 수백개 봉제공장들을 다 수용할 정도로 충분한지 의구심을 갖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재개발 사업 일정에서 후순위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봉제공장 종사자들이 재개발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던 배경입니다. 재개발은 도시의 퇴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수단이어야 할 텐데, 오히려 있던 활력마저 꺼트리는 모순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인 을지로, 세운상가 일대로 가보겠습니다.


1) 서울특별시 도시재생지원센터, 2020년, <서울 도시재생기업(CRC), 상도4동 「상4랑협동조합」 지속가능한 도시재생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다> | https://surc.or.kr/changes/493

2) 국토교통부·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2021년 6월,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 설립지원 가이드북>, 9쪽

3) 위키피디아에 담긴 '코뮌'의 뜻은 다음과 같다 | 코뮌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모여 함께 살며 공동의 이익, 재산, 소유, 자원(일부 코뮌에서는 노동과 수입까지)을 공유하는 공동체이다. 많은 코뮌에서는 공동체 경제뿐만 아니라 합의를 통한 의사 결정, 위계가 없는 사회 구조, 환경 친화적인 삶을 핵심 원칙으로 삼는다. (이하 생략)

4) 서울특별시, 2015년 2월2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도시재생선도지역 근린재생형 활성화계획>,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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