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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Oct 26. 2022

현실의 '홍반장'을 찾아서

2-5. 오래된 동네의 오래된 사람들이 이루는 관계

도시에서 낡았기 때문에 비교적 저렴한 주거지를 무분별하게 개발했을 때 생기는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과 도시의 일자리 사이의 연결이 끊기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 끊기는 문제 또한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 이것을 흔히 '공동체' 같은 말로 표현하곤 합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마주쳐도 데면데면한 요즘, 공동체는 뭔가 실체가 없는 막연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 마을에서 살림, 육아, 여가 등 일상 곳곳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경우는 요즘 아파트 단지에도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이 역시 그냥 쉽게 말하면 '이웃'인 셈인데, 한 동네 안에서 앞집이나 옆집처럼 물리적으로 붙어있지 않아도 이러한 관계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웃보다는 공동체가 더 적합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공동체에 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그 단어에 대해 잠깐 논하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와 익명성이 지배하는 요즘 도시 공간에서 공동체는 너무 낡은 것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해 오히려 해로운 것으로 인식되는 측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2021년 방영한 tvN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서 '공진'이란 가상의 어촌에 우연히 흘러들게 된 치과의사 윤혜진(배우 신민아)이 겪는 사건이 그렇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윤혜진이 도시와 달리 이웃 간 관계가 끈끈해 서로 간섭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풍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갈등을 빚는 내용이 나옵니다. 공진 사람들의 관계를 두고 이웃 간의 정, 사람 냄새가 살아있는 마을 공동체를 잘 그렸다고 치켜세우는 시각1)이 있었던 반면, 윤혜진이 동네 조깅을 할 때 몸매가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지 못하게 하거나 연애 관계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공진 사람들을 두고 사생활 침해, 나아가 '가스라이팅'이라고 비판하는 의견2)도 있었습니다. '공동체'란 단어로 모두 뭉뚱그리기에는 한 동네에 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아주 다양한 측면이 존재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논쟁을 외면하고 공동체란 단어 하나로 애매하게 퉁치기보다는, 현대에도 필요한 '최소한의 공동체'로 관점을 좁히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그것이 '사회안전망'과 비슷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제가 예전에 인상 깊은 만남을 가졌던 한 50대 남성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으로, 도시에 여전히 필요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앞으로 '김씨'라고 부를 그는 마치 <갯마을 차차차>의 '홍반장(배우 김선호)' 같은 인물로 저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김씨를 만난 곳은 서울 남산자락에 자리한 다산동 성곽마을입니다. 산 능선에 우뚝 선 최고급 호텔과 그 주변을 둘러싼 서울성곽길에서 굽어 보이는 동네입니다. 여느 산동네가 그렇듯 다산동에도 3~4층짜리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집으로 오르는 길이 얼마나 가파른지, 여기에서 만난 어떤 주민은 그 경사가 70도는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과장된 인식입니다. 실제 그 정도 경사로를 오르려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가야 할 테니까요. 다만, '70도'는 주민들이 마을의 거주 환경이 열악하다고 여기는 생각의 크기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동네를 다니다 보면 대체 아이나 노인, 장애인은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길을 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불편한 데가 하나 없는 사람도 숨을 헉헉대며 등산하듯 오를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런 동네에서 김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다산동에 40년 가까이 살았다고 합니다. 토박이라고 할만했죠. 김씨가 직접 밝힌 사실은 아니지만 그는 이 동네에서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한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동네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김씨를 이틀 동안 따라다니며 다산동을 둘러봤는데, 그는 이쯤 되는 경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동네를 누볐습니다. 그는 산 능선에서 흘러내려 풀뿌리처럼 뻗어나간 이 동네의 모든 길을 다 꿰고 있었습니다. 한낮 기온이 30도 중반에 이른 한여름에 깎아지른 듯한 경사를 평지처럼 걷는 그 모습은 신묘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김씨는 이 가파른 동네를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이렇게 하루 두 번씩 6개월째 매일 오르내린다고 했습니다. 그는 공무원은 아니었지만, 동주민센터에서 임시로 작은 직책을 하나 맡고 있었습니다. 하루 두 번의 동네 순회는 그 직책을 수행하기 위한 일이었고, 그의 표현을 빌리면 "두 다리에 5단 기어를 넣고서" 비탈과 계단이 어지럽게 얽힌 다산동 골목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서울 남산 위에서 바라본 중구 다산동 일대 전경. ⓒ서울경관아카이브

김씨가 6개월 동안 이렇게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 일이 있습니다.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는데, 주민들이 많이 다니는 중요한 길목마다 '골목대장'을 임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임명이지, 실은 "형님, 여기 오래 사셨으니 이 근방을 좀 책임져 주쇼"라며 읍소하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다 큰 어른들이 웬 골목대장일까요?


골목대장의 임무는 청소와 약간의 '잔소리'입니다. 누군가 휙 버린 담배꽁초를 줍는가 하면, 쓰레기봉투를 아무렇게 툭 던져놓고 가는 주민에게 배출법을 알려주기도 하는 겁니다. 김씨가 임명한 골목대장 중에는 60대 동네슈퍼마켓 주인도 있고, 동네 주부들의 맏언니 노릇을 하는 70대도 있고, 주로 집에 틀어박혀 글을 쓰는 청년 작가도 있습니다. 80대 할머니도 그가 맡긴 임무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할머니는 다산동 주민들이 지하철역을 오갈 때 지나는 아주 중요한 길목에서 골목대장을 맡았는데, 집에 있는 시간보다도 골목에 나와서 누가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지 않는지 감시하는 시간이 더 많아 보였습니다.


다산동에 '골목대장 체제'가 도입된 건 쓰레기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가파른 데다가 비좁고 후미진 골목이 많다 보니 청소차가 들어가지 못해 집 앞 쓰레기가 제때 수거되지 않는 날이 많았습니다. 아침에 내놓은 쓰레기는 청소차가 들르는 밤까지 종일 냄새를 풍기자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쓰레기를 슬쩍 버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었습니다. 자연히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에 쓰레기가 산더미를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안 그래도 골목이 복잡한 다산동에 쓰레기 산이 여기저기 생겨났고, 그 근처에 사는 주민들의 고통이 점점 커졌습니다. '내 집 앞'만 아니면 괜찮다는 생각들이 동네 전체를 망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보다 못해 김씨처럼 동네에 오래 산 사람들이 머리를 맞댔습니다. 직접 나서서 쓰레기를 수거하고 청소하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 결과, 궁극적으로는 동네에 '감시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CCTV가 아닌 진짜 사람의 눈이 필요했고, 김씨처럼 자발적으로 청소를 하던 주민들이 동네를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쏟기로 했습니다. 안 그래도 쓰레기 문제로 골치를 앓았던 동주민센터는 이 주민들에게 청소용품과 비용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스스로 동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주민 모임의 결성, 이렇게 다산동 골목대장이 탄생했습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습니다. 한 동네 이웃인 골목대장들의 활약상(?)이 주민들 마음속에 잠재돼 있던 마을에 대한 관심, 책임감, 애정 같은 것들을 일깨운 것입니다. 다산동은 몰라보게 깨끗해졌습니다. 나중에 골목청소와 감시 활동에 참여하게 된 한 주민은 "누군가 청소를 하고 있으면 처음엔 살짝 미안해하면서 지나쳤다가도, 두 번째 보면 인사라도 나누게 되고, 나중엔 ‘쉬는 날 나도 동참할까?’ 생각하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동네를 밝히기 시작한 주민들의 눈은 골목에 떨어진 쓰레기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골목에는 맞붙은 집이 있고, 그 집에는 사람이 삽니다. 내 집 앞의 골목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곧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됩니다. 다산동은 독거노인, 장애인, 외국인 등 주민 비율이 2020년 기준 서울 전체 평균치를 웃도는 곳입니다.3) 자칫 소외되기 쉬운 이웃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민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골목대장들에게 마을의 세세한 정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노인 부부가 한겨울에 갑자기 보일러가 고장 났는데 방도를 몰라 냉골 같은 방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게 됐다는 둥의 이야기가 골목을 타고 퍼져 김씨의 귀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럼 김씨는 동주민센터에 연락해 이 부부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다산동과 서울시 취약계층 비율 비교. ⓒ<2021 희망지 지역조사 및 의제발굴 용역 보고서>(2021), 53쪽 재구성

아무리 친절한 행정과 꼼꼼한 복지 제도가 존재해도 그 제도에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사람들은 늘 있기 마련입니다. 2022년 8월 죽은 지 한 달 만에 발견된 '수원 세 모녀'4)는 등록된 주소나 건강보험료 납부 실적 같은 행정 데이터로는 파악할 수 없는 사각지대 문제를 일깨웠습니다. 다산동에서는 김씨와 같은 사람들이 이 사각지대를 메꾸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사회안전망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무슨 대단한 정책이나 지원이 필요했던 게 아닙니다. 내가 사는 동네를 낫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남들보다 조금 더 큰 주민들 몇몇이 나서고 뭉치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홍반장'은 드라마에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김씨와 같은 다산동 골목대장들이 현실의 홍반장들입니다.


1) <갯마을 차차차> 제작진은 스스로 '현실주의 치과의사 윤혜진과 만능 백수 홍반장이 짠내 사람내음 가득한 바닷마을 '공진'에서 벌이는 티키타카 힐링 로맨스'라고 소개했다. | 네이버 콘텐츠홈: https://program.naver.com/p/18122723

2) 이진송, 2021년 10월15일, <tvN '갯마을 차차차' 속 서울 깍쟁이 길들이기 서사가 불편한 이유>, 경향신문

3) (주)디자인연구소 이락 건축사사무소, 2021년, <2021 희망지 지역조사 및 의제발굴 용역 보고서>, 서울특별시 도시재생지원센터, 53쪽

4) 2022년 8월 21일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어머니와 두 딸이 숨진 채로 발견됐는데, 이 가족은 이곳에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건강보험료를 내지 않고 있었으나, 체납 통보는 주민등록상 주소지인 경기도 화성시로만 전달됐다. 생활이 어려웠지만 빚 문제 때문에 거주지를 제대로 등록하지 않고 살아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이처럼 사회로부터 '자발적 배제'된 복지 사각지대를 어떻게 찾고 메꿀 것인지 논의가 촉발됐다. 기존 통반장 등을 중심으로 한 주민 조직을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거나 '마을 공동체 활성화' 사업을 강화하는 방안도 거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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