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동네를 바꾸자는데 왜 한사코 버티는 걸까
2014년 겨울, 서울 성동구 행당동의 한 철거 현장을 찾은 적 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1000세대 아파트 단지가 최고 39층 높이로 쭉쭉 뻗어 그 위용을 자랑합니다. 제가 그곳을 찾았을 때는 이 아파트를 짓기 위해 기존 동네를 철거하고 있었습니다. 살던 집이 곧 사라질 곳에서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철거민대책위원회의 총무라는 사람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대책위의 사무실은 재개발 중인 동네의 초입에 있었고, 근처 지상철로로 다니는 전동차의 소음이 닿는 곳이었습니다. 사무실 건물에 걸린 낡은 간판을 보고 동네 구멍가게가 떠난 자리를 쓰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무실 앞에는 평상 하나가 깔려있었는데, 그 위에 놓인 스피커에서는 민중가요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습니다. 건물 주변으로는 '생존권 쟁취' 따위 문구를 붉은 글씨로 써갈긴 깃발이 나부꼈습니다. 붉은 조끼를 걸친 사람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건물 앞을 서성거렸고, 가끔 그것을 바닥에 질질 끄는 소리가 났습니다. 한겨울 살을 에는듯한 날씨까지 겹쳐 제법 살벌한 풍경이었는데, 고개를 들면 그나마 이곳이 그 동네에서 생기를 풍기는 유일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미 철거가 상당히 진행된 동네에서는 온전한 유리창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텅 빈 창틀만 시꺼멓게 입을 벌리고 있어 그야말로 황량해 보였습니다. 사무실 근처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드디어 기자가 왔다"라면서 저를 무척 반겼습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한 노인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대책위 총무에게 그 동네에서 꽤 오래 살았고 당시 이주를 거부하고 있는 주민을 만나게 해달라고 미리 부탁해 그가 데리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볼 수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노인은 잠깐 망설였습니다. 집에 있는 손녀가 마음에 걸리는 듯했습니다. 대책위 총무를 위시한 몇몇 사람들이 그 노인을 재촉해 결국 집으로 가는 길, 이미 철거가 끝난 건물의 잔해와 깨진 유리병 같은 쓰레기들이 발에 밟혔던 게 기억납니다. 그때 저는 그런 풍경들을 지나치며,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어떤 주민들은 철거를 거부하며 버티고 있다는 걸 기사로 보여주기에 참 적절한 구도라고, 그저 그렇게 생각하며 걸었습니다.
동네에서도 한참 들어간 지점에 있는 노인의 집은 반지하 주택이었는데, 노인의 집만 빼고 윗집이든 옆집이든 주변 다른 집은 모두 사람 사는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노인의 남편은 지병 때문에 기력이 무척 쇠해서 집 밖으로 거동조차 어려워 보였고, 미용실에서 일한다는 손녀는 쉬는 날이라서 집에 있었지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습니다. 서너명이 앉으면 다른 여지가 없을 정도로 비좁은 방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그 집을 나서는데 "정말 기자가 왔군"이라며 반기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또 들었습니다. 폐허가 된 동네 어디에선가 어느새 주민들이 하나둘씩 나와 모여든 것입니다. 주민들은 "이제야 언론이 관심을 가져주는구나!"하며 좋아했지만, 나중에 제가 쓴 기사에는 결국 다른 재개발 현장의 이야기가 담기게 됐습니다. 며칠 뒤 총무가 전화를 걸어 "왜 기사가 나오지 않느냐"라며 독촉하듯 말하더군요. 기분이 살짝 불쾌했는데, 어쨌든 그렇게 그 재개발 현장과의 연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 노인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그로부터 한 서너달 지났을 때였습니다. '설마 지금까지 기사를 기다렸던 걸까?'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노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미 원래 살던 동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른 반지하집을 구해 이사했고, 그 동네를 떠나면서 이사비 한 푼 받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받을 방법이 없겠냐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이사를 하면서 이래저래 돈이 들었고 원래 살던 집보다는 집세도 좀 더 올랐는데 뭔가 급하게 돈이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그 노인은 동주민센터에 가서 읍소하기도 하고 사방팔방으로 뛴 끝에 결국 제가 줬던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한 상황이었습니다.
총무라는 사람하고 이야기는 해봤느냐고 물었더니, 그를 비롯해 대책위에 얼굴을 비추던 몇몇이 아파트를 한 채 받았다든가 어쨌다든가 해서 나중에는 아예 보이지도 않더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업에 지장이 생기면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간혹 '딱지(입주권)'를 나눠줘 매수한다는 이야기가 있긴 했습니다. 그 겨울날 총무와 함께 저를 그 동네 이곳저곳으로 이끌고 다녔던 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노인은 믿고 의지했던 대책위가 갑자기 와해되자 할 수 없이 동네를 서둘러 떠났던 것입니다.
그간 사정을 듣던 저도 황당하고 답답한 마음에,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기왕 떠나게 됐으면 방세가 좀 더 싼 서울 외곽 동네를 알아보지, 왜 행당동을 떠나지 않느냐는 게 제 물음이었습니다.
노인의 대답은 간명했고, 그래서 저를 당황하게 했습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폐지를 주워서 팔았던 고물상이 있는 동네라는 것, 그게 노인이 근방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였습니다. 아무래도 노인 입장에서는 안면이 있는 거래처가 편할 수밖에 없고, 또 그 일 자체가 어디서 폐지가 나오는지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같은 일을 하는 노인들끼리 다 알음알음 제 영역을 두고 있는 일이어서 아예 다른 동네로 떠났을 때는 그 일을 똑같이 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제야 저는 지난겨울에 그 노인을 만났을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오래 살던 곳을 떠나지 못하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를 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 노인이 저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노인의 연락은 또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지나며 그 재개발 현장에 우뚝 선 아파트를 볼 때마다 저는 그 노인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