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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선 Sep 03. 2020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무언가 베어나간 느낌의 그림을

지수가 말했다. 

그림을 그려 달라고. 무언가 베어나간 느낌의 그림을.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해왔지만 그릴 줄은 몰라 생각만 해왔다고.

내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웃으며 말한다.


불어오는 바람에, 지수는 머리를 쓸어 올린다. 

드러난 손목엔, 베어나간 자국들이 보인다.

어떤 것은 짧고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얕고

어떤 것은 깊다.


드러난 그것들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드러난 그것들은 지수의 상처이고 아픔이다.

그것들을 만지면, 알 수 없는 지수의 상처와 아픔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나 많이 아팠으면, 얼마나 깊이 슬펐으면. 

기어이 너는 네 손으로, 네 몸을 벨 생각을 했을까.

그 날카로움이 네 몸을 아프게 할 것을, 네 몸에 피가 나게 할 것을 알았을 텐데도.

얼마나 많이 아팠으면, 얼마나 깊이 슬펐으면. 

네 살을 베어 아픔과 슬픔을 도려내고 싶었을까.


손을 뻗어, 드러난 그것들을 만진다. 만져준다. 

짧고 길고, 얕고 깊은 상처들을.


- 난 그냥.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보면 계속해서 들리는 이 소리가 멈출 거 같아.

  처음엔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삐--하는 소리가 났어. 한쪽에서만.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아. 길어도 한 시간 정도 있으면 사라지니까.

  그런데 어느 날, 뒤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혼자 있었는데도 뒤를 봤어. 당연히 아무도 없지. 근데 또 들려.

  내 귀에서 나는 소리였어. 바스락바스락.  

  아직도 바스락 소리가 시작되면 주변을 봐.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하고.

  어떻게 귀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날 수 있어? 종이 구겨지는 소리 있잖아. 


지수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고 싶다. 그러면 정말 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멈출까?

베어나간 그림을 보며, 더 이상 너는 네 몸을 베지 않을까?

여전히 지수의 손목을 만지며,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생각한다.


 - 그래서 고흐가 귀를 잘랐나 봐.


고흐? 지금 지수가 고흐라고 말했나. 갑자기 고흐라니.


- 근데 지수야. 고흐가 이명 때문에 귀를 자른 건 아닐 거야.


- 알아 나도. 그냥 그 사람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기 귀를 잘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자기 손으로 귀를 잘라.

 

  혼자 생각하고 있던 게 입 밖으로 나온 거야. 나도 고흐가... 귀 자른 이유 알아. 알고 있어.


-... 고흐가 귀를 왜 잘렀는지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어. 그냥 다 가설일 뿐이지.


- 그러니까. 그 가설을... 알고 있다고.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그러는 거야 지금? 

  내가 이렇게까지... 뭐 그런 것도 알고 있다.. 얘기해야 하는 거야? 


-  나는 네가 너무 이명 소리에 집착을 하다 보니까 그런 말을 하나 해서. 걱정돼서 그러지.


-  왜? 내가 귀라도 자를까 봐? 그냥 생각하던 게 나온 거라니까. 아무 생각 없이... 

   괜히 얘기했네 진짜.

  

지수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지수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완전히 내려가 안에서 자물쇠로 잠근 것 마냥 굳게 닫혀 버리기 전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지수의 침묵은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일이다.


- 그런데 네가 말하는 베어나간 느낌의 그림은 어떤 걸 말하는 거야? 

  몸에서 뭔가 베어나간... 그런 그림을 말하는 거야? 피를 흘리는 뭐 그런?


-  그럴 거면 왜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해. 그런 사진이나 그림 찾아보면 되지.


-  너무 직접적인가.


-  곪고... 문드러진... 거. 그게 베어지고... 도려내어진 거.


-  곪고 문드러진 거?


-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는구나. 

   손목에 이 상처만 만져주면... 다 알 것 같지?

   나도 네가 알아줄 것 같았는데... 무슨 기대를 하고 그런 그림을 그려달라고 한 건지 모르겠다.

   지금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너 모르지?


-  또 그 말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 거 알면서.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말을 안 하니까. 힘들다는데 말을 안 하니까. 그래도 내 눈에는 드러난 게 그 상처들뿐이라서.

   그렇게라도 만져주고 싶어 하는 거잖아.




지수는 자신의 깊은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고

나는 그녀의 깊은 슬픔을 알고 싶었다.


지수는 나에게 베어내고 싶은 상처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는 대신

곪고 문드러진 그. 것.이라고 말한다. 깊이 이해하고 공감해 줄 줄 알았다.

나는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그녀의 말을 알리 없었다. 곪고 문드러진 채소가 생각나 당혹스러울 정도였으니.


지수는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함을 알고, 그럴 수 있다 생각하면서도 기어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들을 한다.

자세하게 말해 주지도 않으면서 도리어 모르냐고 묻는 그녀를,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불아오는 바람도 없이 조용하고 외로운 저녁이 되었다.

밖은 바람이 부는 것도 같은데 그와 그녀가 있는 

이 집에는 바람도 없고 말도 없이 모든 게 멈추어 버린 것 같다.


지수는 미안해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해 못할 일을 이해하라고 강요한 거 같아서. 

대체 그렇게 말해놓고서는 무엇을 알아주기를 원한 걸까. 

미안한 마음에 그리고 그게 또 서러워져, 지수는 자기 손목을 가져다 만진다. 


남자도 미안해진다. 기다려줬어야 하는 건데. 내가 싫어하는 말 좀 들었다고, 그게 화가 나 그녀의 말을 더 이상 들어주지 않았다. 

맞는 말이다. 손목에 드러난 상처 좀 만져준다고 해서 내가 그녀 안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알 수는 없다.

활짝 웃다가도, 어느 순간 바라보면 깊고 깊은 우물 속에 들어가 버린 것 같은 그녀를

어쩌자고 그리 재촉했을까.




다음 날 아침 지수가 침대에 앉아 길게 호흡을 하고 있다.

바스락이 온 거냐고. 공황이 왔냐며 

놀라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고 손과 발을 주물러 준다.

지수가 웃으며 고맙다 말한다.


웃는 모습에 내 마음 어딘가가 저리도록 아프고 

내 마음 어딘가가 또 동시에 많이도 행복해진다.


- 내 이야기하기 창피해서. 그래서 자꾸 네가 못 알아들을 소리를 했나 봐. 

  다 얘기하면 네가 힘들어질까 봐. 그래서 내가 싫어질까 봐... 그랬나 봐.


- 얘기해줘. 내가 꼭 네가 말하는 그 그림 그려줄게.


- 고마워.


- 근데 지수야.


- 응?


- 고흐 얘기는 하지 마


- 야...


우리 둘의 이야기는 기어이 해피엔딩이 되기를 바란다.

지수의 짧고 길고, 얕고 깊은 상처들은 점차 희미해지며 또 단단해질 테니까.

드러난 상처와, 우물 속에 자리 잡은 아픔들.

나와만 봐라. 

보일 때마다 

드러날 때마다 만져줄 테니.


다시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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