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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선 Dec 29. 2020

안 경 (1)

고등학교 1학년, 처음 안경을 썼다. 

칠판이 잘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밤마다 영화를 보는데 전처럼 선명히 보이지가 않아서.


안경을 맞춘 다음날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간다. 여느 날과는 다른, 정류장 가는 길이다.

 

정류장에 가면 버스에 타기 전까지 볼 수 있었던 남자애가 있다. 안경을 썼으니 좀 더 환해진 눈으로 환한 그의 얼굴을 보겠구나 생각하며 향하던, 여느 날과는 다른 날.

사춘기 소녀가 가졌을 법한 몽글몽글한 마음인가도 했지만. 그 애에 대해 더 알고 싶지도, 누군가와 이 마음을 공유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밤마다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그저, 매일 아침, 반대쪽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그 애를 보는 게 좋았다. 정확히 말하면 감상을 하듯.


그의 주변 사춘기 소년들, 과다 분비되는 호르몬을 어쩌지 못해 목소리도 몸짓도 제어되지 않아 제멋대로인 소년들. 

그들 틈, 잘 빚어진 얼굴과 몸을 자랑하는 그가 있다.

혹시 틀어지기라도 할까 희미하게 웃고,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은 정제되어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말을 하거나 웃으려 입을 벌릴 때 멀리 서 있는 나에게 들리지는 않아도 잘 들어주고 싶어, 집중해 그를 본다. 손짓이나 몸짓이 향하는 그곳을, 부지런히 내 눈이 마음이 따라간다.

 

아름답다 생각한 것 같다. 아름다운 소년이 있구나. 보기에 좋구나 하는 마음.

그러니 오늘은, 안경을 쓰고 흐릿한 눈이 아닌 밝아진 눈으로 그를 보러 가는 그 아침이 얼마나 들떴을까.


나타났다. 그가.

여전히 주변에 어쩌지 못하는 목소리와 몸짓을 가진 소년들과 함께, 조용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봐주겠다 작정을 하고 맞은편의 그를 보기 시작한다. 생각처럼 정말 환하게 잘도 보인다.

.

.

.

놀라 안경을 벗는다.

그가 날. 알.고. 있다. 자신을 보는 날, 아름다운 그를 감상하듯 보는 나를. 나의 시선이 꽤 익숙한 듯, 노골적이진 않으나 분명 내 눈을, 몇 번,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는 날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감상하듯 멀리서 보고 있던 나를 언제부터.

이게 무슨 미스터리 스릴러도 아니고 말이다. 난 그냥 너를 조금 선명히 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나를 알아 채린 너에게 왜 난 이리도 거북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일까.


안경까지 쓰고서는 환히 보겠다 작정한 소년이 날 보는데, 설령 그의 마음이 불쾌함일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은 제쳐두고라도 그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날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뛰어야 할 텐데.

서둘러 안경을 벗어버릴 만큼 당혹스럽고 기분이 좋지가 않다. 어찌 이런 마음이 올라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채, 고등학생은 당연히 학교에 가야 하니 버스를 탔다.

다음날부터 그를 보지 않았다. 상당한 인내가 필요한 한 달이었다. 안경은 항상 가방에 들어 있었고 차라리 잘 보이지 않는 칠판 글씨를 보기 위해 버스정류장이 아닌, 학교에서 안경을 꺼냈다.


달이 지나, 웬 고집인가 싶기도 하고 나의 아름다운 그가 보고 싶어 항상 내가 서 있던 그 자리에 다시 서 그를 기다린다.

맞은편을 본다. 소란스러운 소년들 틈, 그가 보이지 않는다.

서둘러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본다. 보이지 않는다.

내 아름다운 소년은 사라졌다. 그제야 그에 대해 알고 싶은 많은 것들이 샘솟듯 생각나며 소란스러운 소년들에게 다가가 물어라도 봐야 하나 주책을 떠는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이제는 정말 모르는 소년이 되었구나 안심이 되는 마음이 나를 누르는 건 또 무엇인가.


그때 알았다. 고집스레 그를 보지 않으려 애쓰던, 이해할 수 없었던 내 속을.

난 그 아이와 무언가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찾은 너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령 그것을 가지고 있는 '너'라고 할지라도.

 

난 너의 이름을 불러 나에게로 와 꽃이 되어주길 원하지 않았고 다만 하나의 몸짓과 눈짓으로만 널 기억하고 싶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아름답다 말하며, 서로에게 '무엇'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다. 내가 그 시절 많이도 읽고 배웠던 '꽃'이라는 시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길고도 지루한 날들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의미'가 될 만한 무엇이 찾아올 것 같지 않고 부지런히 찾을 이유도 없어 보였다. 17살, 팔딱팔딱 뛰어도 모자랄 그 시절에 난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를 보았고, 길고도 지루할 날들이 이어지기 전의 아침, 잠깐의 반짝하는 시간을 그에게서 찾은 것이다.

'의미'가 아닌 '반짝'하고 말 10분의 시간. 딱 그만큼만.

나는 이편에서 그는 저편에서.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아무것도 개입되지 않는 그 시간이 평안했다. 

하지만, 알아 채린 너로 인해 그 반짝하는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 17살 비뚤어지고 어두웠던 소.녀.의. 고.집.이다.


나중에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제법 진지하게, 사뭇 낭만까지 더해 이야기해줬다. 그때 나는 20대였고 잠깐 그 시절에 취해있던 것 같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그 남자애는 너를 또라이라고 생각했겠지. 아침마다 그 자리에서 맨날 쳐다보다 안경까지 쓰고 나타났으니 얼마나 무서워. 아마 그날 한 정거장 걸어가서 버스를 타아겠다 결심하지 않았을까. 근데 너 진짜 이상하다. 뭔 사이라고 굳이 한 달을 안 봐. 그게 그렇게까지 할 일이야?!

안경 쓴 또라이 스토커 여자아이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사실일지도. 솔직히 상관은 없다.

하지만 마음에 남은 게 있었다. 넌 왜 이토록 '개입'과 '의미'를 두려워하나.





나빠진 눈은 당연히 좋아질 줄 몰랐고 안경을 쓰고 환해진 스크린을 밤마다 보다 보니 눈은 더 나빠졌다.


여전히 안경을 끼지 않은 채 거리를 걷고 사람들을 만났다. 어느 날은 지나가는 누군가 작정한 듯 잡고서는 묻는다. 왜 아는 척을 안 하느냐고, 몇 번 인사를 하는데도 왜 그냥 지나가냐고. 너무 놀라 화를 내려는데  미안하다 말한다. 꽤 가까운 사람이었다. 화를 낼 법하다.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많이 지나쳤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하던 사람도 있었지. 

그래도 여전히 고집스레 흐린 눈으로 거릴 걸었다.

사실 시력은, 어정쩡했다. 안경을 쓰면 아주 환하게 보여 편했지만, 쓰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그리 불편을 주지 않는. 사실 내 갈 길만 정확히 안다면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는 크게 상관이 있지 않다.

 

무엇보다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것이 영 편하지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그의 얼굴의 변화가 너무 뚜렷이 보여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잦아졌다. 저런 표정을 지으며 지금 나에게 뭘 요구하는 건지,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주고 어떤 표정을 지어줘야 하는지. 그의 감정을 따라갈 수도, 따라가고 싶지도 않은데. 또 날 너무 살피는 것도 같아 불편하다. 안경을 벗고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본다. 선명히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참 편안하다 생각하면서도...

너는 참 이기적이고 어리석구나. 외로운 주제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나가는 것들을 볼 때에는 안경을 썼다. 자세히 보기 위해.

잘 모르는 사람들과 지나가는 자동차와 건물들이 오히려 보기 편했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 상관없는 것들.

상처 주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상처 받지 않을 무관한 사람들.

날 살피지 않는, 내가 살필 필요 없는 스쳐갈 것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꽃'이 되고 '꽃'이 되어주지 않아도

서로에게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것들.

그것들이 좋았다.

'의미'도 '개입'도 없는 것들.

그러면서도 넌 참 이기적이구나 어리석구나 하는 생각을 또 어쩔 수 없이 하며,

다시 안경을 써야 하나 머뭇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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