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서
누가.
운다.
알고 있다.
가슴에 멍울진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올라오는 그것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얼마나 마음을 다잡고. 다잡다. 터져 나온 눈물인지를.
난 정말 알고 있어요. 말해주고 싶다.
알고 있기에 따뜻한 말을 해주고, 눈을 보며 손을 꼭 잡고 함께 울어주고 싶다.
그런데 왜,
입만 달싹 댈 뿐, 아무 말도 하질 않아.
당신의 얘기에 마음이 애닳아 바람이 이는데, 눈물은 나오질 않는 건지.
손을 잡아주고 싶었는데.... 깍지를 끼다니.
마음이 바빠진다. 눈물이 서둘러 들어가는 것이 보여.
다시 용기를 내려는데, 그새 눈물은 사라져 버린다.
또 늦어버렸다.
당신 옆의, 보이지도 않는 빈 공간마저 외로워 보여 채워주고 싶다, 바라보고 있었는데
다행히, 얼른 다른 이가 가 손을 잡아주고 운다.
비워져 있던 그 공간이 채워지고, 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은 엉켜져, 그들 중 누구의 것인지 알 수도 없다
놓여진 마음으로 나도 함께 울기 시작한다.
늦지 말아야지. 내 앞에 누가 울 때, 얼른 옆으로 가 안아주며 울어줘야지.
내 사랑하는 사람 눈물이, 민망해 들어가 버리기 전에.
영화 미드소마.
친절함 속에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불편함, 내내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도 드러나는 덩어리 진 어둠,
아름다운 꽃들 만발함 속에서 보이는 구역질 나는 인간들의 추함.
그렇게 영화를 보다가...
여주인공 데니가 운다.
우는 데니를 무리의 여자들이 따라간다. 에워싼다.
엄마와 아빠와, 동생을 잃었다. 덩어리 진 어둠은 나오지 못한 채 데니의 목구멍 위까지 차올라 있다.
간신히 견디고 있는 중인데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버린 데니는.
어쩌면 꼭 봐야 했었던 것을 본 데니는.
토해낸다.
울며 절규하며 토해낸다.
밑바닥서부터 올라오는 그것들을 토해내느라 몸부림을 치고, 귀를 막아버리고 싶을 만큼 크고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에워싼 여자들도 데니와 함께 울기 시작한다.
데니의 눈을 바라보며 네 속에 있는 것들을 다 게워내라고, 더 크게 울고 더 몸부림을 쳐 토해내라고 말하는 듯 함께 운다.
눈물은 이제, 마음이 슬퍼 눈물샘에서 나오는 분비물의 기능을 넘어 데니에게 '정화와 배설'의 역할을 한다.
카타르시스. 우리 몸속에 독이 되어버린 것들을 배설시키는 행위.
어둠과 죽음, 불결과 불신으로 덮여진 그녀의 삶을 '정화' 해주는 '의식' 에 필요한 '울음'.
위로가 꼭 저렇듯 '의식'적 일 순 없다.
위로를 이렇게 하라고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영화 또한 결코 아닌 건 본 사람은 알 테지만.
다만, 데니의 울며 일그러지는 그 얼굴 속에서 분명한 무언가가 해갈된 듯한 그녀의 표정이 한동안 생각이 났고
슬픔에 울던 사람들이, 또 슬픔에 울던 내가 생각났다.
하여
적어도 내 앞에서 누가 울 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배려인 줄 알고 고려하던 여러 가지 이유를 스스로에게 대지 않고
바로 달려가, 그 사람만 보고 바로 달려가 함께 울고 안아주어야 하겠다고.
그의 슬픔과 아픔을 충분히 '공감'하여, 그 확신을 가지고 그를 위로하러 달려가는 건 아니다.
그것까지 할 수 있다 말할 순 없다.
나는 그가 아니고 그도 내가 아니기에. 우리는 결코 겪지 않은, 상대방의 이야기 속 슬픔과 아픔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다.
하지만 난, 당신의 눈물을 보고 마음이 애닳아, 들끓어, 바람이 일었다고.
흐느껴 울 때 떨리는 당신의 어깨를 그냥 둘 순 없어 왔다고.
그 마음이면 된 것 같다.
그 마음이면.
당신의 눈물과 나의 눈물이 합쳐져
당신의 슬픔이 정말 말처럼 나눠져. 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제일 좋은 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슬픔에 울지 않는 날들을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그 또한 올 날이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