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나 보다. 벌써 사람들의 얼굴은 좀 전과는 다른 표정이 되어 자신들의 어린날을 기억한다.
6남매로 자란 한 패널은 아버지가 잠든 자기를 안아 방에 데려다준 날을 이야기한다.
잠은 깼지만 아빠의 오롯한 사랑을 받고 있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잠든 척을 했다고. 그때로 돌아간 그의 얼굴은 활짝 웃어 주름이 드러나지만, 소년 같다.
가끔 거실에서 잠든 막내를 안아 방에 데려다줄 때가 있다. 이제 안기에는 너무 커 버려 무겁다 무겁다 말을 하며 가지만 안겨있는 아이도, 안고 가는 나도 행복한 건 마찬가지다.
내려놓고서도 바로 나오지 못해 안아주거나 아이 볼에 뽀뽀를 한다.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막내를 안아 데려다주던 6남매의 아버지도, 지금 주름진 그와 같은 환한 얼굴로 어린 날의 그를 내려다봤을 것이다.
오롯한 아빠의 품, 내 품 안에 오롯이 안긴 아이.
또 다른 이는 엄마 등에 업혀 학교 가는 중학생 형을 배웅 해던 날이 떠오른다 한다. 사춘기 형은 엄마나 동생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진 않았지만 꼭 한 번은 뒤를 돌아봐 주며 씩 웃음을 날렸다고.
엄마의 따듯한 등에 업혀 사랑하는 형의 웃는 모습을 보며 아마 따라 웃었을 어린 그는, 또 얼마나 행복했을까.
아빠의 품, 엄마의 품이다. 가장 좋았던 기억은. 아직은 조그마해 엄마 아빠 품에 폭 안겨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낼 수가 있었던 어린 시절.
행복하지만 아린 듯 웃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보자니 나도 어린날이 떠오른다.
감기로 며칠을 아플 때 엄마는 밤새 내 방을 다니셨다. 드나드는 소리에 외려 잠이 깨기도 했지만 엄마의 손길이 좋아 열에 들떠서도 모른 척을 했다.
이마를 짚으며 '열이 이렇게 많이 나서 어떡하나' 하면서도 혹시 배앓이까지 할까 얇은 이불을 꺼내 배를 덮어 주셨다.
다른 집 가서는 밥을 잘 못 먹던 나는 항상 집에 와 소나기밥을 먹었다. 엄마는 입맛이 별나다 했지만 엄마 밥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의 입 속에, 엄마 음식을 넣어주며 환하게도 웃으셨다. 이렇게 잘 먹는 딸이 아파 며칠을 못 먹고 있으니 엄마 속이 얼마나 탔을까. 이제 좀 열이 떨어지고 입맛이 도는 걸 본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 냄새와 음식을 만드는 소리에 깨어 엄마를 부른다.
부르는 소리에 엄마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서둘러 방에 와 뭘 좀 먹겠냐고 묻는다.
단 게 먹고 싶다고 말한다. 설탕이 잔뜩 묻혀진 도넛이 .입이 너무 까실해 단 게 들어가야 입맛이 돌 거 같다고.
힘은 하나도 없어 뵈는 딸이 까칠한 입 안이 어쩌고. 입맛이 돌겠다느니 이런 말을 하자 엄마는 또 별나다 하면서도 바삐 도넛을 사러 가신다.
아직 감기 기운은 남아 있지만 도넛 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나아진 듯 방을 나와 부엌으로 간다.
엄마는 없지만 얼마나 아픈 딸을 위해 열렬히 음식을 하셨는지, 그 기운이 아직 부엌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같다. 주인 없는 부엌에서 손질된 채소들과 볶아지던 고기들, 끓여 올려지던 찌개 냄비도 잠깐 엄마를 기다리며 소강상태에 있는 것처럼. 나도 이들과 함께 부엌에서 엄마를 기다린다.
서둘러 벗어진 앞치마가 참 깨끗하기도 하다. 이렇게 깨끗이 입을 거면 뭐하러 앞치마를 입나 웃으며 생각하는데, 얼마나 빨리 다녀오셨는지 벌써와 입안에 도넛 하나를 넣어주며 벗어놓은 앞치마를 얼른 다시 입으신다.
"너 때문에 아침부터 바빠 죽겠다 그냥. 저것도 다 하다 말고"
다시 앞치마를 입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손질하다 만 채소들을 도마에 올려 칼질을 하기 시작한다.
엄마가 움직이는 부엌은 다시 활기가 돈다.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있는 부엌이다.
까칠한 입 안에 도넛을 넣으니 단 맛의 설탕이 뾰족뾰족 입 안을 찌르는 듯 하지만 기분이 좋아지며
정말 입맛이 돌기 시작한다.
엄마. 나 입맛 돌아왔어. 밥 주세요. 엄마가 아팠던 딸에게 제일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 우리 집 부엌은 또 바빠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