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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선 Dec 12. 2020

밤에 누우면, 내 등을 타고 많은 것들이 올라가.

하루를 끝내고 밤에 누우면, 내 등을 타고 많은 것들이 올라가.


분명 잠들지 않아 꿈은 아닌데, 눈만 감고 있는데, 온갖 것들이 내 등위로 올라가.

죽음이나 슬픔 삶의 무게, 뭐 이런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니야. 저런 건 오히려 내게 너무 가까이 있어 등을 타고 올 필요도 없거든.

피아노, 주전자, 책상, 이불 같은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그런 구체적인 물건들이 올라가.

눈을 감고 있어도 그것들이 올라가는 게 보여. 그렇게 많은 것들이 올라가니 어떻겠어.

무겁고 피곤하지.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게를 지고 걷는 사람처럼 나도 모르게 등이 말려져 있다니까.

내려놓고 싶은데, 이것들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올라왔는지 알 길이 없으니 내려놓는 방법도 알리 없지.

아프지는 않아. 차곡차곡 내 등위로 쌓여만 갈 뿐, 어떤 아픔이나 고통을 주지는 않거든. 그래서 무서운 마음이 들지는 않나봐.

하지만 여전히 무겁고 피곤은해.

옆으로 누워 있으면 등을 타고 올라가기 쉬운가 보다 싶어,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워봐.

소용없어. 얼마나 기운이 센지 바닥에 붙여진 내 등을 기어이 밀고 또 올라가더라고.

차라리 쉽게 올라가라고 옆으로 누워 자는 날들이 많아졌어. 


꿈을 꾼 거라고 넌 말했지만, 등에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잠들 수조차 없는데 꿈이라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책을 보는 네 옆에 누워.

너는 가끔, 너도 모르게 소리 내며 책을 읽곤 하는데 난 그 소리를 듣는 게 참 좋아.

그럴 때면, 내 등에 올라가는 것들도 아주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아. 무겁지 않은 작은 파란 꽃병이나 예쁜 구두, 초록 장갑 같은 게 보이니까.

계속 소리 내서 책을 읽어달라고 말할까 널 봤는데,  넌 네 옆에 내가 있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아 그만뒀어.

넌 어딘가, 내가 갈 수 없는 어느 곳에 있으니까. 내가 그곳에 있는 널 깨우면 여러 번도 봤지만, 절대 적응할 수는 없을 낯선 얼굴로 날 볼 테니까. 깨우지 않을거야.


갑자기 난 더 외로워졌고

네게서 몸을 돌려 몸을 더 웅크리고, 웅크려.


내 등위로 쌓인 것들이 많기도 해 천장에 닿을 것 같아. 이제 더 이상 올라탈 데가 없구나 생각했는지 올라오는 것도 없어졌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

등은 무겁지만, 이것들을 달고도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많이 피곤하고 힘이 들어.


외할아버지가 꿈에 나왔으면 좋겠어. 갑자기 할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린 나는 며칠을 말을 하지 않았데.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 이불속으로 들어가. 컴컴한 이불 안에서 계속 할아버지를 불러.


할아버지는 내가 부르면 어디에 있던지 금세 나에게 왔으니까.

할아버지가 죽었어도 나에게 올 거라고.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없다면 나에게만은 보일 거라고.

아무도 못 볼 거라 생각한 곳이 고작 캄캄한 이불 속이었지만, 거기서 난 작은 소리로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 몰라. 그날들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둠 속 할아버지를 부르던, 이불속 어린 날의 나는 생각이 나.

비록 그날 할아버지가 내 부르는 소리에 오시진 않았지만 자주 꿈에 나오셨거든.

어느 날은 장난감을 사준다고 날 데리고 우리 동네를 걸어. 그런데 가는 곳마다 문이 닫혀 있는 거야. 동네에는 문방구가 3개나 있었는데 다 문이 닫혀 있었어. 할아버지는 슬픈 얼굴로 미안하다고 말해. 꿈에 깨서도 할아버지 슬픈 그 얼굴이 생각나 많이 울었어. 다시 꿈을 꾸면 할아버지가 나타날까 눈물을 닦고 잠들려 했는데 잠이 오지가 않아 또 많이 울었지.

또 한 번은, 할아버지가 나한테 맛있는 음식을 건네주셨어. 그런데 얼굴은 또 좋지가 않아. 왜 그러시냐고, 나랑 같이 이거 먹으면 안 되냐고 하는데 할아버지는 한 마디도 안 하고, 화가 난 얼굴인지 슬픈 얼굴인지를 하고 가셨어.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힘든 나날들을 보내며 그 꿈에서 할아버지가 준 음식이 생각났어. 미리 아시고 속이 상하셨나. 항상 손녀 울면 먹을 거 쥐어주시더니, 정말 맛있는 음식을 주고 가셨네 하고.


오늘처럼 많은 것들이 내 등위로 올라타 힘든 이 밤에는.

옆에 있는 이도 위로가 되지 않는 이 밤에는, 꼭 할아버지가 내 꿈에 나왔으면 좋겠어. 

자주 사주시던 피자가게 생각이 나고, 어릴 적 동방플라자인지 플라자인지 피아노에 맞춰 분수쇼 구경을 하던 그곳도 같이 가고 싶어. 할아버지랑 꼭 같이 만나던 안 사장이라 부르시던 할아버지 친구분 생각도 나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만 보면 울으시던 안 사장 할아버지.


할아버지뿐이었어. 마음 놓고 온전히 부를 수 있는 사람. 마음대로 화를 내고 울고 짜증을 내도 다 받아주는 사람. 많은 어른과 함께 했지만 할아버지 같은 어른은 없었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일찍 철이 들었는지, 어른들의 힘듦이 다 느껴져 전처럼 할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울 수도 응석을 부릴 수도 없었어. 많은 것들을 이고 지고 살아가는 어른들이 어린 내 눈에도 참 힘들어 보여. 

앞으로도 없겠지. 이제 나도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내가 부른다고 누가 할아버지처럼 항상 달려오겠어. 운다고 먹을 걸 쥐어주겠어.

그러니 오늘은 꼭 내 꿈에 나와줘.

항상 미안한 얼굴, 슬픈 얼굴 말고 웃을 때 옆에 주름 가득이던 할아버지 웃는 얼굴로. 

그런데 오늘 할아버지가 날 보면 슬퍼할 수도 있겠다. 등에 웬 짐이 그리 많냐며 걱정하시겠어.

그래도,

걱정을 해도,

오늘 꿈에서 만나 손녀 짐 다 떼어주세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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