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예진 Sep 13. 2019

천사들의 네일살롱

바쁜 일상에 찾아온 잠깐 동안의 딸 체험



아이들 개학 전날이라 이런저런 준비로 분주한 날이었다. 오전 중 벨이 울려서 문을 열어보니 현관 앞에 동네 꼬마들 넷이 서있었다. 모두 여자아이들이었고, 만 다섯 살 정도부터 여덟 살 정도의 연령대가 섞여 있었다. 최근 들어 몇 집 건너 이웃 마당에서 자주 모여서 노는 아이들이었다. 그중 제일 큰 아이가 의젓하게 말하길, 자신들이 손톱 미용 사업을 시작했으니 매니큐어를 칠하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가격은 1달러. 막내로 보이는 꼬마가 불쑥 나서서 거들었다.


“손 마사지도 해드려요!”


나는 아들만 둘을 낳아서 내 아이들이고 아이의 친구들이고 거의 남자 아이들만 상대해왔던지라 조그만 여자애들이 몰려와 짐짓 심각하게 호객 행위를 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뱃속이 다 간질간질했다. 곧 점심 준비를 해야 하고 오후에는 외출할 일도 있어서 여유가 없는 와중에도 말상대를 좀 해주면서, 지금은 바쁜데 혹시 시간이 날 경우를 위해 기억해 두겠다며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파자마 바람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던 둘째 아들은 예고 없이 몰려온 여자 애들에 놀라 소파 뒤로 도망가 숨어서 듣고 있다가 나와 꼬마 아가씨들 사이의 대화가 우스운지 낄낄댔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또 벨이 울렸다. 아까 왔던 아이들 중 더 어린 아이 둘이었다. 분홍 헬멧을 쓰고 분홍 자전거를 붙든 채 서서 이제 시간이 나느냐고 물었다. 점심을 차리고 있던 중이라 곤란하다고 하니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핀잔을 줬다.

“내가 뭐랬어? 아까 왔었던 집이니 다른 데로 가자고 했잖아!”

무안을 당한 아이가 기죽은 표정과 목소리로 오물거렸다.

“이 아줌마는 꼭 할 것 같아서 그랬지…”


삼십분 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넷 중 큰 아이 둘이 다시 왔다. 보스급들이 최후 공략에 나선 모양이었다.

“이제는 할 일을 다 하시지 않았을까 해서요.”

아이들은 거절을 돌려 말하는 어른들의 기술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걸 간과한 내 잘못이었다.

“우리 집 문 앞에 앉아서 해도 되면 할게. 집을 비울 수는 없거든.”


아이들은 저만치 떨어져있는 나무 그늘 밑  놀이 본부를 네일살롱이라고 명명한 바였다. 예측하지  못했던 출장 서비스 제안에 꼬마 아가씨들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지만 결국 고객의 요구는 수용이 되어 딜이 성사됐다.

기술자로 추정되는 아이와 내가 나란히 현관 포치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어시스트 격 아이가 냅다 달려가 가방을 가져왔다. 자그마한 쇼핑백 안에 무려 다섯 개나! 되는 매니큐어가 들어있었다. 어시스트는 포치 위에 매니큐어 병들을 늘어놓더니 다른 손님이 올지도 몰라 자기는 살롱을 지키겠다며 휭 하니 가버렸다.


내 손톱을 칠해줄 기술자의 이름은 시드니였다. 전문성을 존중해주는 차원에서 실제 살롱에서 하는 대로 손톱칠을 하기 전 지불부터 했다. 동업자들도 있는데 1달러는 너무 적은 것 같아 팁이라고 이름 붙여 2달러를 줬다. 시드니의 지프락 현금 주머니를 흘끗 보니 지폐 두어 장에 동전 몇 닢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개시 영업이 잘 되고 있냐고 묻자 시드니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으며 멋쩍게 웃었다.

“별로요. 아줌마가 두 번째 손님이에요.”


저런. 전 직원이 동원되어 오전 내내 홍보한 것치고는 시장 분위기가 너무 냉랭하지 않은가. 바꾸어 말하면 내가 이 동네 ‘레이디’들 중 두 번째로 만만한 ‘호갱님’이라는 얘기다. 아니나 다를까. 시드니가 덧붙였다.

“제 느낌인데, 아줌마가 이 동네에서 제일 좋은 분 같아요!”


나는 늘어선 매니큐어 병들을 둘러보고는 보라색과 연두색 두 가지를 고른 뒤 오른손과 왼손에 각기 다른 색을 칠해보고 싶다고 했다. 시드니는 내게 ‘매우 탁월한 취향’이라고 칭찬을 해주고는 비장한 태도로 매니큐어 병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여름날의 정취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씨였다. 햇살은 강렬했지만 그늘진 현관 앞은 쾌적했고, 이웃 중 누군가가 방금 잔디를 깎았는지 지나가는 바람에 업힌 풀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여릿한 손이 내 손가락을 붙들고 매니큐어를 칠하는 걸 보고 있으니 노곤해지면서 솔솔 잠이 오기까지 했다. 스파 서비스를 받을 때와 별 다르지 않았다. 보통 그런 곳에서는 직원이 손님한테 말을 붙여 친근감을 표시하는데, 시드니는 아직 그런 영업기술까지는 터득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혹시 실수라도 할까 극도로 집중하느라 눈이 몰릴 정도였다.


삐질삐질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괜스레 몇 가지 질문을 건네니 아이도 긴장이 풀리는지 제 이야기를 풀어놨다. 알고 봤더니 집이 매사추세츠에 있는 아이였다. 최근 대대적으로 집수리를 하게 되는 바람에 코네티컷의 외갓집에 와서 여름을 보내고 있는데 얼마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거였다. 결국 시드니와 엄마는 혼자 남은 외할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유품 정리도 할 겸 이곳에 좀 더 머물러있기로 결정했다고.


그런데 시드니는 매사추세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단다. 거기서 학교 다닐 때 반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는 음악을 좋아해서 악기 배우는 게 취미인데, 반 아이들이 자기 기타를 망가뜨렸을 때는 너무 슬펐다고도 털어놨다. 그 말을 할 때는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조금 있다 보니까 코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만나는 인적 그물 바깥쪽에 있는 이들과 말을 섞게 되면 의외로 속내를 잘 털어놓는다. 특히, 타인과 속 이야기를 할 만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미국인들이 미용실, 네일살롱, 이발소 같은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별의별 수다를 다 떠는 걸 자주 본다.


나 역시 이곳 생활이 길어지면서 닮는지, 평소에 내비치지 않는 심중을 엉뚱한 곳에서 생전 처음 본 사람들에게 풀어놓는 일이 잦아진다. 일상에서 겪는 것들이 대개 거기서 거기인지라 시답잖은 내용에도 반색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등장해 맞장구를 곁들인 만담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희한한 것이, 처음 본 사람인데도 공감대를 형성해 수다를 떨고 나면 다시 만날 일 없는 인연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종의 연결성에 위안 받으며 마음이 가벼워진다.  


나는 오른쪽에는 보라색, 왼쪽에는 연두색으로 칠이 된 열개의 손톱을 내리쬐는 햇살에 비춰봤다. 시드니의 긴장한 얼굴이 피드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솜씨이긴 한데 삐뚤삐뚤하진 않아도 어른이 내보이고 다닐 정도로 매끈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원래 손톱에 뭘 바르면 답답해서 견디지 못하는 성미니 당일 내로 지울 게 뻔했다. 그러고 나면 시드니의 눈에 띄지 않도록 피해 다녀야겠지.


그러나 요만한 가면쯤이야.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정말 예쁘게 칠했다고 찬사를 터뜨렸다. 시드니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나중에 다시 와서 반짝이 들어간 투명 매니큐어 덧칠해 드릴까요? 방금 바른 게 다 말라야 칠할 수 있으니까 오늘 오후, 아니면 내일이요.”

나는 시드니의 초록색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웃어줬다.

“괜찮아. 지금 칠한 색이 너무 예뻐서 이대로가 좋거든.”


시드니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매니큐어 병들을 쇼핑백에 담았다. 내게 아홉 살짜리 절친은 필요 없듯이 시드니도 동네 아줌마는 금세 잊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그날의 ‘제일 좋은 분’-favorite lady-이었더라도. 다만 우리 집 포치에 앉아 있던 시간이 아이에게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같은 <별 것 아니지만 위안이 되는> 풍경으로 기억되기를. 네일살롱 놀이가 분주한 내 하루에 끼어들어 딸 체험이라는 추억을 만들어 준 것처럼.


“고객이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돌아선 시드니가 우리 집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나는 잠시 포치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늦여름 매미들이 쌔애 쌔애 울어댔다. 낮잠이나 한 숨 잤으면 싶은 오후였다. 딸 체험이 남긴 말랑하고 보송한 여운을 베개 삼아.





이전 01화 다이앤의 미트 파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