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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원 짜리 사고를 쳤다. 여보 미안해.

고백의 핵심은 타이밍

by 찬란

“라임씨 정말 고마워! 와이프 병원비로 잘 쓸게.”

“네 차장님.”

“그리고 걱정 말고. 우리가 어디 한두 해 본 사이야? 다 다음 달쯤 비트코인 팔아서 바로 이자 쳐 갚을게.”

“네 사모님이 쾌차하시면 좋겠네요…”






천만원 짜리 사고를 쳤다. 회사 차장님께 천만원을 빌려줬다. 아무리 가까워도 돈거래는 하는 게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다. 나 때문에 코인 손해를 본 분이었고, 회사에서 항상 나에게 업무적으로 도움을 준 분이었다. 게다가 아내가 아프기까지…


“매일 회사에서 얼굴 보면서 어떻게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겠어. 돈 없는 분도 아니고. 돌려받을 텐데…”


그런데…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그냥 두 달 뒤에 돈을 받을 때까지 함구하는게 낫겠지?


아내는 몸이 약했다. 괜히 두 달 동안 스트레스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사 근처 은행에 들렀다.


”과일나라 석유화학 재직중이시죠? 한도 일억 신용 대출 가능합니다.“

”예, 고맙습니다…“


대기업 사원증이 나에게 1억짜리 마통을 열어주었다. 천만원을 땡겨서 차장님 계좌로 보냈다.


“여보, 미안해…”


은행문을 나서며 누구도 듣지 못할 사과를 혼자 중얼거렸다. 두 달 뒤면 원복될 돈이야. 어차피 마통은 하나 열어두려고 생각 중이었고. 아내 걱정시키지 말자. 별 일 아니야.


한숨을 푹 쉬며 다시 회사로 향했다.






“여보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어? 왜 내 얼굴이 안 좋아?”

“꼭 어디 아픈 사람처럼 낯빛이 어두워. 살도 좀 빠진 거 아니야?”

“어? 어… 요즘 다이어트한다고 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나…채식 위주로 했더니…”

“혹시…“


아내가 나를 노려보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당신, 그 비트코인 다시 하는 거 아니겠지?“

”아 안 한다니까! 그냥 저번에 200만원만 벌고 다 팔아서, 당신 다 보여줬잖아.“

”흠…“

”왜…왜 생사람 잡고 그래? 아니라니깐…“

”알았어, 아님 됐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아내가 말을 이었다.


”실은, 나도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자도 자도 피곤하고. 식욕도 없고.“

”왜, 왜 그래? 당신 어디 아파?“


아내가 아프면 안되는데. 절대 안되는데.


“뭐 좀 쉬면 괜찮겠지. 오늘 저녁 육개장 먹을래?”

“어어. 육개장 좋지. 난 고사리 많이 넣어줘.”


어영부영 넘어갔다. 그나저나 아내가 아픈 건 아니겠지. 미처 몰랐는데 아내도 요 며칠 야윈 것 같다. 왜 이렇게 수척해 보이지?






“차장님,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어, 라임씨. 내가 지금 급히 회의에 들어가야 해서. 내가 나중에 콜할게. 미안!“

”아…네 알겠습니다. 차장님.”


돈이 입금되는 순간 관계가 묘하게 달라졌다. 수시로 담배를 태우고 커피를 마시자며 나를 불러내던 건 용과차장이었는데. 나에게 천만원을 빌린 후 이제 만나자고 하는 건 내가 되어 있었다. 한량처럼 껄껄 웃으며 나를 수시로 불러냈던 그가, 지금은 세상 바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라임씨, 내가 좀 바빴네. 아니 요즘 우리 팀에서 사장님 보고를 준비하는 게 있거든. 팀 전체가 달라붙어 준비하고 있으니 나도 정신이…허허.”

“아, 네 차장님. 요즘 영업1팀이 바빠 보이더라고요.”

“어어, 나 지금 담배 필 시간도 없어서, 출근하고 지금 첫담이야. 진짜로.”


용과 차장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나도 모르게 콜록거렸다.


“차장님, 그런데요. 그… 와이프 분은 괜찮으세요?”

“어어, 덕분에. 이건 평생 관리해야 하는 병이라 하더라고. 그나저나, 요즘은 비트코인 어때? 나 너무 바빠서 못 들여다 봤어.”

“어, 저도 한동안 안 봤는데요. 저는 그냥 다 팔아버려서요.”

“내가 얼마 전에 그 뉴스 봤잖아…”


영양가 없이 스몰 토크가 오가고 담배를 비벼 끈 용과 차장과 엘리베이터를 다시 탔다. 결국 돈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다.


약속한 두 달 기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보, 사실은…할 얘기가 있어.”

“왜…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놀랍게도 할 얘기가 있다며 먼저 말을 꺼낸 건 아내였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어서 나까지 가슴이 철렁했다.


“여보…미안해.”

“뭐…뭐가? 왜? 왜 미안해?”

“나 사실은…올케한테…돈 빌려줬어.“

”올케? 그…처남한테 무슨 일 있었어?“

”동생은 괜찮은데…올케 아버님이 지금 많이 아프신가봐. 갑자기 운동하시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고 하더라고…“

”아니…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서 돈이 필요하대?“

”올케는 전업주부라 융통할 돈이 없고, 보험도 마땅히 안 들어놓으셨다고 해서… 그런데 당장 간병비가 필요하다고…“

”어…얼마를 빌려줬어 그래서?“

”그게…천만원…”

“처,천만원…? 당신 그 돈이 있었어?”

“사실은…신용 대출 받았어. 우리 돈 다 주식에 들어가 있잖아. 빼기는 아까워서.”

“아……”


리액션이 고장났다. ‘천만원’ 이라는 단어가 반향음처럼 내 머릿속을 꽉 메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내는 야무지게 투자하고 절약하는 똑순이였지만 이렇게 마음이 약할 때가 있었다. 특히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면 더더욱…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올케 가족이 아프다는데 천성이 선한 아내가 돈을 빌려준 게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지금 너도 고백해! 지금이 타이밍이야!


나도 용과 차장에게 천만원을 빌려준 걸 지금 말할까? 자백하고 광명 찾을까? 객관적으로 아내보다 내가 더 잘못한 것 같긴 하지만 지금 얘기하면 용서 받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이미 마음 아파하는 아내가 이 일로 더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떡하지? 몸까지 더 아플지도 몰라.


망설이는 사이에 말할 타이밍이 지나버렸다.






“미안해 여보. 그치만 올케가 그렇게 우는 건 처음 봤어.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해 버렸어. 이제야 말해서 정말로 미안해.”

“괘, 괜찮아. 사람이 아픈데 살리고 봐야지.”

“정말? 이해해 줘서 고마워….”


아내가 나를 격렬하게 껴안았다. 내 입에서 이런 대인배 같은 소리가 나오다니. 놀랄 노자였다.


아무래도 아내에게 용과 차장 이야기는 다음에 하는 게 좋겠다.

돈 다 돌려 받고 나서 해야겠어.


그리고…


“여보, 나 들어가서 공부 좀 할게. 시험이 얼마 안 남았거든.”

“응, 여보 괜찮은거지? 고마워…”

“으이구 괜찮아, 올케한테 힘 내시라고 전해줘. 시간 되면 병문안이라도 같이 가자.”

“여보…“


감동 받은 아내를 뒤로 하고 컴퓨터 방으로 들어왔다. 아내를 향한 죄책감과 미안함, 용과 차장을 향한 약간의 분노, 그리고 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온갖 감정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다음 달 등록해 놓은 시험을 무조건 잘 쳐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합격해야 해. 그래서, 내 능력을 키워서, 앞으로도 돈을 잘 벌 수 있도록 해야 해.


”어릴 적 집안 분위기 안 좋으면, 독서실로 도망가 공부하던 게 생각나네.“


<재무관리 및 금융 공학> 책을 펼쳤다. 시험은 두 달 뒤였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나는 금융업계로도 이직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


이번 시험이 끝나고 나면,

용과 차장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돈을 받아내자.


일단은 그 때까지 아무 생각 말고 이 악물고 공부하자. 고등학교 때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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