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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보스 Jun 06. 2024

임밍아웃을 꼭 해야해?

그냥 나만 알고 있으면 안될까



© joannakosinska, 출처 Unsplash





나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다. 내가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거나 인싸는 아니지만, 감사하게도 다정하게 곁을 지켜주는 좋은 이들이 있다. 생일이 있는 달이라 그런지 친구들을 만날 일들이 많았다. 생일을 앞두고 친구와 전시회를 다녀오기도 하고, 그 즈음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대학원 동문회가 전망 좋은 호텔에서 한대서 급하게 일정을 조율해 강릉으로 떠나기도 했다.


문제는 다른 생일과 다르게 올해 나에게 새로운 이슈가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너무 초기라 굳이 누군가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다. 언뜻 찾아봐도 12주 정도는 지나야 안정기가 된다니 이제 막 심장소리를 들은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알리는 건 섣부른 판단 같았다. 게다가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때 상대의 반응이 어떨지, 어쩐지 오글거리고 불편할 것 같은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이래저래 생일 즈음에 만난 이들에게는 별다른 내색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강릉여행은 조금 달랐다. 잠깐 만나서 식사하고 차마시는 모임과 달리, 이 여행은 무려 1박 2일 동안 진행되며 같은 방을 쓰고 내내 붙어있을게 분명했다. 그리고 함께 하는 친구가, 나와 오래 한 방을 썼던 룸메이트였고, 나보다 먼저 결혼을 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갖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그래서 실제로 같이 산전검사도 받으러 다녀왔던 친구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몰라도 이 친구에게는 꼭 말해야 했다. 부모님에게 알리기 전에, 그래야 하는 상황을 마주했다.


강릉에 아침 일찍 가야했기에 하루 전날 우리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같이 바다보러 간다니 잔뜩 신이 난 친구가 우리집에 왔다. 살짝 흐릿한 그날 오후, 룸메이트 시절 같이 즐겨먹던 떡볶이를 포장해서 집으로 왔다. 같이 먹을 오뎅탕도 잔뜩 끓였다. 한참을 먹고, 못다나눴던 이야기를 펼쳐대며 웃고 떠들다가 슬쩍 꺼내어 친구에게 내밀었다. 두줄이 선명한 임테기. 그리고 초음파 사진을.


임신사실을 처음 말하는 것도 어색했지만,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먼저 결혼한 친구가 어쩌면 나보다 더 아이를 기다렸을 수도 있는데, 나에게 아이가 먼저 찾아와서 친구의 마음이 상하지는 않을지. 조심스럽고 미안했다. 뭐라고 말해야할지도 사실은 몰랐다. 임테기를 본 친구가 울었다. 너무나 축하한다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잔뜩 들떠 좋은 이모가 되어 주겠다고 했다. 조금은 미안했고 많이 고마웠다. 분명 좋은 이모가 되어줄 게 틀림없었다.


강릉가던 길, 내린천 휴게소에서 먹었던 아이스크림  |  길을 잘 못 들어 만나게 된 바닷가


그렇게 우리는 강릉으로 떠났다. 아, 운전은 내가 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워낙 운전을 좋아하는 데다가 강릉 정도야 이전에도 몇번씩 오갔던 터였다. 대신 동문회에 참여하는게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가는 길에 길을 잘 못들어(!) 점심을 먹고 늦게 도착했다. 강릉엔 비가 내렸다. 친목도모를 위해 우리는 서로 다른 조로 찢어져 흩어졌다. 같은 호텔방을 쓰는 대신 조가 갈린 것이다. 처음 보는 분들과 같은 조가 되었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엄마 뻘인 분들도 계셨다. 자기 소개를 하는데 누군가 물었다. 아이가 있냐고.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네, 임신 중이에요. 우리 엄마도, 아빠도 모르는 소식을 처음 본 분들에게 전했다.


동문회에서 처음 만난 분들과 한조가 되어 함께 먹었던 초당순두부 아이스크림



예전에 기독교 영성 관련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기도와 관련해서 지도해주시는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기도할 땐 나와 거리가 먼 기도부터 하라고. 예를 들면 세계 평화라든가, 저 멀리 우크라이나의 평화 같은. 그리고 점점 가까이 기도의 반경을 좁혀가라고. 그래야 좀더 순수하게, 순전하게 기도할 수 있다고.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임신 소식을 알리는 방식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처음 만나는 분들에게, 어쩌면 다시 못 볼 수도 있는 분들에게 먼저 그 소식을 알리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사심없는 축하와 축복을 받았다. 동문회에 참여한 이 중 임산부가 있다는 소문은 금새 퍼져나갔다. 늦은 오후 우리 그룹에 전했던 소식을 그날 저녁 모든 이들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문회가 끝나고 난 후, 나는 주최측의 축하와 함께 기프티콘까지 받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조식을 먹고 일찍 나왔다. 임신 초기라 조심해야 하는 데다가 이후의 일정은 동굴 탐험 같은 문화체험이었으니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친구와 함께 강릉 곳곳을 누볐다. 작은 동네 서점, 바다가 보이는 카페, 등대가 예쁜 바닷가. 집에 오는 길에는 야무지게 냉면도 먹었다.


조식, 동문회로 인해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렸는지 음식이 부족했다. 호텔 조식에 음식이 부족하다니 말도 안돼!
드라이브하기 참 좋은 강릉
맑게 개인 하늘
집에 오는 길에 먹었던 냉면



예상하지 못하게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임신 소식이 전해졌다. 아주 가까운 친구부터 처음 본 이들까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하며 느낀건, 이 소식이 참 축하받을 소식이라는 것. 가까운 이는 나를 더 잘 알기에 함께 기뻐하고, 나를 잘 모르는 이는 그저 순수하게 새 생명이 잉태된 것에 대해 기뻐하고. 아직 이 소식을 전해야할 이들이 많이 남아있기에, 또 언제 어떻게 전해야 할지 까마득하지만, 분명한 건 꽤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다. 나에게도, 나를 아는 이들에게도, 나를 잘 모르는 이에게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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