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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보스 May 23. 2024

어? 나 임신한건가?

운수좋은 날, 나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 그날 아침

이사하기 전날 미리 가져다둔 몬스테라 화분


날씨가 유난히 좋았다. 아직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아니지만 밤공기가 포근하고 그러면서도 답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은 지방선거가 있는 날이라 우리 둘다 출근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직장과 가까운 빌라에서 4년 가까이 살았다. 그게 첫 신혼집이었다. 결혼 전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었는데 채광이 좋지 않은 작은 원룸에 살다 보니 깨끗하고 햇볕이 잘 드는 곳으로 이사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래서 찾고 찾은 첫 신혼집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신축이었고 대학원생이던 내가 학교에 다니기에도, 남편이 출퇴근하기에도 가까운 곳이었다. 살다보니 마냥 아늑하고 아름다웠던 공간이 조금씩 작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즈음에 감사하게도 또 다시 우리는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3층 빌라에서 지하주차장을 거쳐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으로 올라가는 느낌은 전혀 새로웠다. 계약기간이 끝나갈 무렵 이사를 하게 되어 크게 잡음이 없는가 했지만, 이사 당일에는 잔금이 들어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짐은 다 뺐는데 잔금이 들어오지 않아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입주할 집에 가서 대기하고, 나는 빈집에 앉아 잔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서성였다. 짐이 다 빠진 빈집을 보고 있노라니 여러 감정이 오갔다. 그러던 중 바닥에 장판이 주욱 찢긴 것을 보았다. 아, 아침부터 화분도 하나 깼었지.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언짢아하던 이삿짐센터 직원에게 바닥이 찢어진 것을 이야기했다. 원래부터 그랬다고 얘기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잔금이 들어오지 않아 기다리게 해서 그런지 집주인도 후에 별말이 없었다. 오래 기다렸지만 그럭저럭 이사도 잘 마쳤다. 


이사는 했지만 짐정리가 다 끝난건 아니었다. 풀지 못한 박스도 한 켠에 있고, 정리가 되지 않은 물건들이 이리저리 비집고 들어가 공간을 차지 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퇴근 후에 그리고 틈틈이 짬을 내어 조금씩 짐을 풀었다. 그렇게 맞이한 꿀맛같은 휴일이었다.


범죄도시2 엔딩크래딧 - 손석구님 영화 찍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수요일을 앞둔 화요일 오후, 그냥 보내기 아까운 그날을 우리는 불태우기로 했다. 당시 '나의 해방일지'에 잔뜩 몰입하던 나는 평소라면 절대 보지 않을 것 같은 영화인 범죄도시2를 보러 가자고 했다. 전국민(!)이 구씨를 추앙하던 시기였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늦은 시간 영화를 보는 내내 고생했을 구씨를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꽃시장에도 갔다. 새벽부터 시장을 한대서 갔더니만 우리 같은 일반인이 아닌, 소매상들을 위한 시간이긴 했다. 쭈뼛쭈뼛 기웃거리다가 꽃을 두어다발 샀다. 조금 더 가면 노량진수산시장이라 횟감도 보러 갔다. 가는 내내 유튜브에서 어떻게 횟감을 골라야 하나 단기속성으로 특강을 듣고 거대한 광어를 사고 저멀리 해가 뜨기 전 서둘러 집에 와서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아무런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찾아갔던 꽃시장, 수산시장 - 광어가 엄청 싱싱했다. 



그런 아침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호사스런 여유와 스쳐지나가는 생각대로 오가던 그 날밤의 작은 일탈. 즐겁고 만족스러운 그 아침에 어쩐지 나는 임신테스트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에서 덜깬 내 뇌가 한순간에 각성하는 경험을 했다. 


두 줄이다. 


그렇게 나는 임신을 확인했다.  



지방선거가 있던 6월 1일 아침



지난 밤 꽃시장에서 산 꽃들은 나에게, 우리에게 찾아오는 새 생명을 축하하는 꽃다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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