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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보스 Jun 13. 2024

엄마가 울었다

저장해두고픈 임밍아웃의 순간



© fan11, 출처 Unsplash



갑작스런 강릉여행으로 인해 생각보다 많은 이들에게 임신 소식이 알려졌지만, 정작 알려야 할 이들에게는 아직 전하지 못한 상태. 생각보다 늦은 것 같아 보이지만 이 마저도 아직 8주가 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엇이 그리 조심스러웠는지는 몰라도 안전하게, 보다 안정된 상태에서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결혼 4년차에 접어들며 어쩌면 이 소식을 기다리셨을지도 모르는 양가 부모님들에게 확정되지 않은 소식으로 섣불리 전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9주차에 접어들었을 때, 직장에서 1박 2일 출장을 가게 되었다. 분주한 여름 프로젝트를 앞두고 몸보신 겸 단합대회 겸 여러 의미를 가진 행사였다. 별일이야 있겠냐마는 어찌되었든 평소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니 조심스럽긴 했다. 문제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진 모임이었다. 차를 오래 타는 것도, 일정이 많은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른 건 다 괜찮았는데 아직 썰렁한 저녁 시간 차디찬(!) 맨 바닥에 앉아있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모임 장소가 거실 같은 공간이었고 모두가 다 의자에 앉기엔 애매하니 어르신 두분만 소파에 앉으시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맨 바닥에 앉아 모임이 진행되었다. 아니, 남자들은 그렇다 치지만 여자들한테는 방석이라도 줘야하는거 아닌가? 이렇게 앉아있어도 되나. 안되는거 아냐? 별별 생각이 스치며 모임 시간 내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다. 


모임이 얼추 마무리될 무렵, 한사람씩 돌아가며 근황을 나누는 시간, 도저히 찬 바닥에 앉고 싶지 않았던 나는 결심했다. 아, 말해야겠다.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보다 앞,앞선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15주가 되었어요.'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데 대략 이정도 되었던 것 같다.) 한발 늦었다. 빵 터뜨리기에는 뭔가, 15주에 훨씬 못 미치는 9주 따위가 명함을 내밀 수 있을까. 에잇 모르겠다. 나의 차례가 왔을 때, 이러저러한 근황과 함께 마지막에 한마디를 보탰다. '아, 저.. 9주 되었어요.' 


다시 생각해도 임신소식을 알리는 건 못할 일인 거 같다. 나는 왜 이게 이렇게 남사스럽고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너무나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알리는게 참, 어색하다. 어찌되었든 이 말 한마디로 내 자리는 차가운 맨 바닥에서 대표님 옆자리로 승격(!)되었다. 나는 소파에 앉자마자 소파 위에 놓인 쿠션과 방석을 다른 여자 동료들에게 건내주었다. 


임신 소식을 전한 후 처음 받은 선물. 진짜 오빠처럼 축하해주셔서 감동했던. 다시 떠올려도 감사하다.


자, 이제 나의 임신소식을 아는 사람은 남편, 친한 친구, 동문회에 왔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직장동료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지방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가기로 했다. 어떻게 소식을 전할까 생각하다 검색해보니 임밍아웃을 위한 수많은 컨텐츠들이 온라인 가득 판매하고 있었다. 스크래치 형식으로 된 복권모양의 카드, 초음파 사진을 넣은 축하 카드, 임신테스트기를 넣을 수 있는 선물상자 등 다들 이벤트에 진심인듯 보였다. 뭐, 그렇다면 나도 빠질 순 없지. 초음파 사진을 넣을 수 있는, 축하드린다는 메시지를 담은 카드를 주문했다. 양가 부모님 모두 이미 손주를 보신 상태이니 "할아버지, 할머니 되신 걸 축하해요" 카드 앞에 "또"를 적어넣었다. 


토끼띠 예정인 아가를 위해 처음 구입한 양말. 임밍아웃 이벤트를 위해 구입했다.



모처럼 부모님과 함께 식사하는 날이라 맛있는 걸 먹기로 했다. 내 생일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메뉴와 식당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 몸에 좋은 소고기를 먹기로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생일파티를 겸한 모임이라 축하를 위한 꽃과 케이크,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좋은 소식을 전하기에 아주 적당했다. 한참 식사가 무르익을 무렵, 영상촬영을 위해 살짝 카메라를 켜둔채 부모님께 카드를 전했다. 더위가 슬슬 시작되는 시기에 불판 앞에서 고기를 굽자니 다들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고 지글거리는 고기굽는 소리에 정신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카드는 전해지고 엄마는 카드를 열어보더니 한참을 보다가 띠용(!)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정말?이라고 외쳤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돌았다. 고기 굽느라 정신 없는 아빠를 툭툭 치며 카드를 건내셨다. 어잉? 물음표와 느낌표가 난무하는 자리였다. 엄마는 울컥하시며 사실은 걱정을 했었다고 너무 잘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엄마가 울었다. 나도 울컥했다. 


사실 그 외엔 예상보다 밍숭맹숭했다. 지나고 나서 유튜브에서 임밍아웃 영상을 찾아보곤 했는데, 특히 외국인들의 반응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꼭 외국인이 아니더라도 격한 놀람과 감동의 축하가 이어지는 영상들도 많다. 반면 우리집은 어? 어! 축하해.. 정도랄까. 

나중에 집에 와서 전해들으니 사실 아버지는 너무 놀라 표정관리가 안되셨다고 한다. 다른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와중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셨다고. 동생은 여전히 실감이 안난다고 몇번을 말했다고 하고. 


남편의 본가에도 소식을 전했다. 예상보다 미지근한 반응에 김이 새기도 했고, 이미 체력을 많이 소진한 늦은 저녁 시간이라 영상을 따로 찍지는 못했다. 이미 훌쩍 자란(아직 초등학생, 유치원생이긴 하지만) 손주가 있으신터라 그리 놀라지 않으실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카드를 슬쩍 건내며 소식을 전했는데 예상보다 격한 반응이 이어졌다. 내색은 않으셨지만(가끔, 아주 가끔 한두마디 하신 적이 있긴 하지만) 기다리셨던지 많이 축하하셨다. 그리고 기뻐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아직 가까운 이의 임신 소식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아, 몇 년 전 친한 언니를 만나러갔다가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뜨악 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긴 하다. 더 가까운 이의 임신 소식을 제대로 들은 기억은 없다. 그래서 어떻게 전해야 할지, 어떻게 전해들어야 하는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던거 같기도 하다. 미지근했던 나의 임밍아웃 순간을(물론 울컥한 순간이 있었고, 그 뒤로도 그 영상을 여러번, 꽤 여러번 돌려보긴 했지만) 종종 추억하며, 다른 이들의 임밍아웃 영상을 꺼내보곤 한다. 걱정과 기다림을 넘어 전해진 생명의 소식,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 놀라거나 너무도 간절히 기다렸기에 눈물이 앞서는 순간. 


여전히 어색하고 어떻게 말해야할지 전해야할지 - 정답이 없다하더라도 -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기쁨과 놀라움, 감동의 순간이라는 것. 임밍아웃, 소중한 이에게 소식을 전할 땐 영상을 꼭 찍어두기를. 


소소한 임밍아웃 꿀팁 

1. 임신소식을 전하는 시기가 정해져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까운 이일 수록 빨리 알리기

- 괜히 미루고 늑장부리다가 서운해지고 민망해지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어떻게 아는지는 묻지 마시라.. 일찍 말 못해서 미안해... 

- 보통은 안정기라고 불리는 12주 이후에 알릴 것. 배려가 필요한 직장생활일 경우, 주의해야 하는 임신초기에 알리고 필요한 배려를 꼭 받을 것. 


2. 임밍아웃을 위한 아이템들을 활용할 것!

- 임신사실을 가장 먼저 알 수 밖에 없는 본인을 제외한 모두에게 사용 가능함!!! 임테기를 활용하거나 초음파사진을 활용하거나. 시중에 나와있는 아기자기한 아이템들이 많으니 적절히 사용할 것. 


3. 임밍아웃의 순간은 감동 또 감동의 순간이니 꼭 사진 또는 영상으로 남길 것 

- 딸의 임신사실을 전해듣는 부모님의, 특히 엄마의 표정은 감동 또 감동. 슬쩍 찍어두고 생각날 때마다 두고 두고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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