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도시, 무너진 건축: 건축을 둘러싼 미스터리
2부. 신전과 궁전, 권력과 음모의 공간 (16~30화)
글, 그림 : 이동혁 건축가
"저기가 바로 크렘린 궁전이야."
2023년, 러시아 모스크바. 겨울의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눈발이 휘날리며 붉은 광장을 덮고 있었다.
고고학자 이반 페트로프(Ivan Petrov) 는 거대한 붉은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백 년 동안 러시아 권력의 중심지였지. 그리고… 수많은 음모와 저주가 얽혀 있는 곳이기도 해."
젊은 연구원 알렉세이(Alexei) 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저주라니, 무슨 말인가요?"
이반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황제들의 죽음과 권력의 파멸. 크렘린은 그저 권력의 상징이 아니야. 어쩌면, 저주받은 땅일지도 몰라."
크렘린 궁전(Kremlin Palace)은 15세기 이반 3세(Ivan III)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 러시아 제국, 소련, 그리고 현대 러시아까지 모든 권력의 중심지로 사용되었다.
수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즉위하고, 전쟁을 계획하며, 정치를 다스렸다.
그러나 동시에, 이곳은 권력 다툼과 배신, 죽음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반은 알렉세이를 데리고 크렘린 궁전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여기가 바로 ‘피의 방’이라 불리는 곳이지."
어두운 복도를 지나며 이반이 말했다.
"여기서 이반 뇌제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어.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도 말이지."
알렉세이는 소름 끼친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의 아들을…요?"
"그래. 그날도 이 방에서 그토록 유명한 사건이 벌어졌지. 이반 뇌제는 아들과 격렬하게 다투다가 결국 그를 지팡이로 쳐서 죽이고 말았어."
"그게 정말 사실인가요?"
"역사적으로는 그렇게 전해지고 있지. 그 사건 이후로 이반 뇌제는 미쳐버렸다고 해. 그리고 그가 죽기 전, 크렘린 궁전에 저주를 남겼다는 이야기도 있어."
이반은 크렘린 궁전의 창밖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반 뇌제 이후로도 많은 황제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어."
러시아를 근대화하려던 표트르 1세는 끊임없는 반란과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그가 크렘린 궁전에서 밤마다 들었다는 불길한 목소리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혁명으로 인해 온 가족이 처형되었고, 그 비극의 그림자가 크렘린을 휘감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부 사람들은 니콜라이 2세의 저주가 지금도 크렘린을 뒤덮고 있다고 믿었다.
알렉세이는 두려움에 떨며 물었다.
"그래서… 저주가 진짜라는 건가요?"
이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사람들이 크렘린 궁전에서 이상한 소리와 환영을 보았다고 해. 특히 밤에는…"
알렉세이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떤 소리요?"
"발걸음 소리. 누군가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소리. 그리고…"
이반은 잠시 말을 멈추고, 목소리를 낮췄다.
"이반 뇌제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도 있지. 자신의 실수와 죄악을 되뇌는 목소리."
알렉세이는 크렘린 궁전의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정말 저주 때문이라는 건가요?"
이반은 침착하게 말했다.
"저주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거야. 권력과 욕망이 만들어낸 끔찍한 기억들이 남아 있을 뿐이지."
"그럼… 우리가 들은 건 단순한 환상인가요?"
이반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환상일 수도 있고, 진실일 수도 있지. 하지만 중요한 건,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믿고 있다는 거야."
크렘린 궁전은 여전히 붉은 벽 속에서 고요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단지 표면일 뿐, 그 아래에는 수많은 음모와 비밀이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은 지금도 낮게, 그러나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반 박사님, 이 이야기는 끝난 건가요?" 알렉세이가 물었다.
이반은 조용히 대답했다.
"아니, 알렉세이. 이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