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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르 Mar 02. 2018

8_문학은 어떻게 읽을까

지금은 소설을 읽는 모임을 만들어서 운영할만큼 소설을 사랑하지만 나는 소설을 전혀 읽지 않았다.

때때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나도 그저 허구라고 생각했들 뿐 거기까지였다. 돌이켜보면 이유는 두 가지였던 것 같다.


하나는 훌륭한 소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둘은 소설을 읽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 포스팅에서는 소설읽는 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평일 오전 9시. 한산한 투썸플레이스에서 하루키를 자주 읽었다.

소설은 예술이다


소설을 읽기 전에 상기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소설은 예술이라는 것이다. 여러 예술 책들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는 데에도 방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몰랐고 그래서 소설을 즐길 수 없었다.


예술은 복잡한 장르다. 칸트의 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인간에게는 오성과 감성이 있는데 우리는 주로 오성을 쓰며 살아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이 달리는 속도에 맞추기 위해서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현대인의 하루는 학창시절의 시간표처럼 해야할 to do list로 가득하다. 우선 출근 준비를 해야 하고, 만원 버스를 타야하고, 마감이 다가오는 프로젝트를 준비해야하고 돌아와서는 널브러져 있는 집을 치워야 한다. 감성은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거나 재미있는 인터넷 가십거리나 볼 때 가끔 흐를 뿐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굉장히 이성적으로 보낸다.


예술은 이 얼어있던 감성이 녹는 시간이다.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작품을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과제에 치여 있었다. 이 작품도 레포트를 쓰기 위해 자료들을 뒤적거리다 본 것 같은데 첫 느낌이 묘했다.


푸른 색채의 나무들에 둘러쌓인 벌거벗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 스스로가 미지의 섬에 들어선 것 같았다. 인상주의 화가답게 아름다운 색채가 한참 동안이나 내 눈동자를 적셨다.


칸트에 따르면 예술이 제대로 기능하는 순간은 평행선으로 달리던 오성과 감성이 이처럼 교차하는 때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소설을 이성적인 뇌로 읽었던 것 같다.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라 생각하고서 뻔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하면서 고대의 물건을 관찰하는 감정사처럼 소설을 읽었다.


이래서는 도무지 소설을 즐길 수 없다. 뾰족했던 마음을 둥글둥글하게 만들어야 한다. 소설은 작가가 만든 허구의 세계다. 작가는 그 세계에 우리를 초대하고 우리가 숨겨진 메세지를 해독하기를 바란다.

훌륭한 소설일수록 그 여정은 흥미진진하고 그 메세지는 어렴풋하다. 우리는 책이라는 입장권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 세계에 입장하는 여행객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소설을 빨리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백이 필요하다.


소설에 흥미가 생길 무렵 친구에게 신선한 말을 들었다. 친구는 최근에 본 만화를 나에게 소개해 주고 있었다. 주인공이 길을 따라 유유히 사라지는 그 챕터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내가 다음 장을 넘기려 하자 그가 말했다.


“잠깐만. 여기에서 잠시 쉬어줘야 해.”

나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중요한 대목이라구. 여기에서 잠깐 멈추고 이 여백을 잠깐 느껴줘야 해.”


소설읽기는 만화책 그리고 영화 읽기와 비슷하다. 이 세 가지 장르의 교집합은 서사다. 서사는 그 템포를 느껴줘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동안 소설을 지나치게 빨리 읽었다. 비문학에서 정보를 흡입하듯 허겁지겁.


비문학은 속독을 해도 좋다. 하지만 소설은 다르다. 정보를 전달하는 글이라면 결론부터 읽어도 상관 없지만 서사의 묘미는 그 과정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 결론을 다 알고 있다면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결론만 말할 거라면 그 전 까지의 서사가 굳이 왜 필요하겠는가. 서사는 예술가가 품을 들여 작곡한 교향곡과 비슷하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좀 더 쉽게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영화의 장면들은 저마다의 템포가 있다. 풍경이 나오는 경우는 다소 느리고 대화는 조금 더 빨라지며 사건이 터지는 장면은 긴박하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라 서사에 따라 롱테이크, 숏테이크처럼 샷의 길이도 달라지고 음악도 흐른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템포를 느끼고 여백이 필요한 순간에 숨을 돌린다.


소설도 이렇게 읽으면 된다. 다만 소설은 활자로만 된 예술이라 그 리듬을 의식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조금만 의식하고 읽으면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다. 문단의 길이가 샷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드거 앨런 포의 이야기는 롱테이크가 많다. 문장들이 길고 문단도 길다. 세부적인 묘사가 많이 들어가서 호흡을 길게 내뱉아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레이먼드 카버의 글은 반대다. 건조한 문체라 감정 묘사가 극히 적다. 문장와 문단 길이도 짧아서 술술 읽힌다.


소설은 이렇게 문단을 기준으로 풍경의 샷, 독백의 샷, 대화의 샷, 묘샤의 샷을 장면을 상상하면서 그 리듬을 느끼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샷과 샷 사이에 여백이 생길 거다. 인물들의 대화가 끝나고 주인공 혼자 길을 걷기 전이나 긴박한 사건이 마무리 되고 난 후의 이야기 사이에서. 그 여백에서는 자연스럽게 숨을 돌리면 된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상념이 녹아든다

상념을 메모하자


소설의 매력은 행간을 읽는 것이다. 앞 서 말했듯이 작가는 메세지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은 모순적이다,라는 결론으로만 말한다면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밀란 쿤데라의 농담 등 세상의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사라질 것이다. 훌륭한 소설일수록 그 메세지는 은근하게 플롯 속에 녹아있고 독자는 메세지가 드러나기 까지 사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모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소설 자체도 굉장히 매력있었지만 K와 주인공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저마다 달랐다. 왜 K는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을지, 내가 선생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그래서 결국 작가가 전달하고자 고픈 메세지가 뭐였을지 우리는 둘러앉아 열띤 채 행간을 읽었다.


[책을 읽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라는 포스팅에서도 말했지만 소설을 읽고 상념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그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음악을 듣고 그 감동을 마음에 담 듯 소설이 주는 감동만 가져갈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조금 아쉽지 않을까.


아무튼 이렇게 행간을 읽으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바로 메모다. 나의 경우 소설을 읽다가 인물들의 말이나 행동에서 의문이 생기면 그것 옆에 간단히 상념들을 끄적여 둔다. 왜 이러는거지? ~해서 그런가? 우산이 의미하는게 뭘까? 이런 식으로.


별 것 아닌 메모지만 이것은 비문학 읽기처럼 책을 다 읽었들 때 아주 큰 도움이 된다. 다시 책을 처음부터 넘기면서 메모한 것들을 넘기다 보면 왜 결론이 그렇게 끝났는지,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독서 모임을 한다면 책 이야기를 할 때 나눌 이야기도 더 많아진다.


소설에는 영화가 가지지 못한 매력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모두 소설이 활자예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소설은 앞서 말한 서사의 템포나 여백을 느끼는 시간을 내가 정할 수 있다. 아름다운 장면은 더 느리게 읽고 감정이입이 크게 되는 장면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에 책을 잠시 덮어둔다. 영화라면 좋은 상념이 떠올라도 어쩔 수 없이 지나치기 마련인데 소설은 메모를 해 둘 수 있어서 좋다.


이제 설명하고 싶은 것은 다 설명한 것 같다. 소설을 지어낸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하던 내가 이런 포스팅을 쓰다니 놀라운 일이다. 자, 이제 푹신한 소파에 기댄 채 마음의 근육을 풀고 소설을 펼쳐보자. 조금 더 느린 여정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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