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수다로 타락할 때, 사물은 어리석음으로 타락한다. 이는 거의 필연적인 결과처럼 보인다."(The enslavement of language in prattle is joined by the enslavement of things in folly almost as its inevitable consequence.)(발터 벤야민, <언어와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중에서)
발터 벤야민은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깊이 성찰했습니다. 그는 언어가 깊이와 의미를 잃고 피상적인 수다로 변질될 때, 사물 역시 본래의 가치를 잃고 왜곡된다고 경고합니다. 이 통찰은 한나 아렌트가 언급한 상투어의 위험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아렌트는 상투적인 언어가 도덕적 책임을 마비시키고 인간성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했습니다.
벤야민에게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닙니다. 언어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창입니다. 그러나 언어가 상투적이고 얕은 표현들로 가득 찰 때, 그 창은 점점 흐릿해지고, 사물 역시 본래의 의미를 잃어갑니다. 현대의 소비문화는 벤야민이 경고한 언어와 사물의 타락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광고는 제품의 본질을 말하기보다 이미지와 환상에 집중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브랜드의 신발이 "성공적이고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약속한다는 메시지는 그 신발의 실제 기능과 가치를 흐리게 만듭니다. 이처럼 사물은 본질을 잃고, 단지 소비를 자극하기 위한 허상으로 전락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벤야민의 통찰을 확장하여, 상투적인 언어가 인간의 도덕적 판단과 책임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녀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그가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상투적 표현을 반복하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던 사례를 지적합니다. 상투어는 행동의 도덕적 무게를 가볍게 만들고, 진정한 성찰을 가로막습니다. 예를 들어, "다들 그렇게 한다"나 "원래부터 그래왔다"는 말은 잘못된 행동을 비판하거나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무디게 만듭니다. 아렌트는 이러한 언어가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흐리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작용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언어와 문화는 벤야민과 아렌트의 경고를 더욱 절실하게 만듭니다. 소셜 미디어와 광고는 짧고 자극적인 메시지로 가득하며, 깊이 있는 사고와 대화를 방해합니다.
언어의 피상성
우리는 일상 대화에서 "다 잘될 거야" 같은 상투적인 위로에 의존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말들은 순간적으로는 위안을 줄 수 있지만, 상대방의 감정을 깊이 이해하거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소비의 허상
광고는 상품을 단순한 소비 대상으로 축소시킵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광고는 제품의 기능보다 "당신을 돋보이게 하는 삶의 동반자"라는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이런 접근은 소비자가 물건의 본질적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도덕적 책임의 회피
"원래 그렇게 해왔다"거나 "시스템이 정해놓은 대로 해야 한다"는 말은 현대 사회에서도 종종 들립니다. 이러한 태도는 도덕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잘못된 관행을 고치려는 노력을 방해합니다.
벤야민과 아렌트의 통찰은 우리가 언어와 사물을 대하는 방식을 성찰하라고 요청합니다. 현대인의 일상에서 이 교훈을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표면적인 말로 대화를 끝내지 말고, 상대방의 진심과 감정을 들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세요. "괜찮아" 대신 "무엇이 가장 힘든가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더 깊이 있는 소통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둘째, 물건을 살 때 단순히 광고 메시지에 휘둘리지 말고, 그 물건의 본질적 가치와 내게 필요한 이유를 고민하세요. 셋째,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세요. 이는 생각 없는 관행에서 벗어나 비판적 사고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벤야민과 아렌트는 우리가 언어와 사물을 단순히 소비하거나 피상적으로 다루지 말고, 그것들의 본질적 가치를 탐구하라고 촉구합니다. 언어는 진실을 표현하고 사물을 이해하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우리의 도덕적 책임을 강화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