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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코치 Jan 08. 2019

#8 사자 탈을 쓴 당나귀

고집 센 동료와 대화하기

 “이 멍청한 당나귀야, 왜 시키는 대로 제대로 일을 못하냐? 고집은 엄청 쎄 가지고 쯧쯧…” 오늘도 주인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다. 얼마 전 저 당나귀는 소금을 지고 가다 일부러 넘어져 강에 소금을 버린 죄로 좋아하는 당근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당나귀는 당나귀대로 불만이 있다. '아니, 강을 건널 생각이면 애초에 소금이 안 녹게 잘 포장을 하던지, 강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던지 해야지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저 주인 녀석은 내가 잘못하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아. 매사 사사건건 시비야.' 주인은 꾀를 부리는 당나귀가 괘씸해서 더 무거운 짐을 올려놨다. 그냥 지나가도 힘들 법한 험난한 산 길을 평소보다 더 무거운 짐을 메고 넘으려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주인이 자꾸 왼쪽으로 가라고 재촉하며 고삐를 당기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자꾸 오른쪽으로 향한다. '이러면 또 고집 피운다고 떠들어대겠지.'라고 투덜거리며 걷다가 그만 돌을 밟아 오른쪽 발목을 삐끗했다. 무게 중심을 잃고 넘어지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짐도 함께 쏟아졌다. 주인은 벌게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에잇! 이놈의 당나귀한테 어떻게 말을 해야 알아먹나? 내가 소금 장사를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씩씩거리며 화를 주체하지 못한다. 소금장수는 어쩔 수 없이 산동네 마을 수의사를 찾아갔으나 허탕을 쳤다. 무슨 일인지 수의사가 죄를 저질러 아테네에 끌려갔단다. 


 밤이 늦어 산속 동네에 머물렀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에게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요즘 참주인가 점주인가 뭐로 바뀐 후에 사자를 잡으려고 온통 들쑤시고 다녀서 동네 분위기가 어수선해요. 지난주에도 사자 가죽을 벗기던 병사 하나가 다른 사자가 갑자기 공격해서 결국 죽었어요. 사자 잡는 거랑 지네 정치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을 사람들은 말했다. 


 당나귀는 어렸을 때 사자를 멀리서 본 기억이 있다. 성난 사자의 포효를 듣고 다른 동물들은 모두 머리를 박고 후들후들 떨고 있을 때 철이 없어 그랬는지 사자의 날카롭게 빛나던 송곳니를 보며 짜릿한 전율과 함께 인생의 롤모델로 삼아야겠다 다짐했던 시절이 있었다. 한 때는 사자로 태어나지 못하게 한 부모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당나귀는 그렇게 동경하던 사자가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에 화가 났다. 사람에 대한 분노는 더욱 깊어졌다. 다음날, 새벽 동이 트자마자 출발했다. 새벽 산속 마을은 고요했다.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맡으며 오솔길을 걷고 있는데 주인이 어제 마신 술이 덜 깨었는지 오솔길 옆 저수지에서 세수를 하고 오겠단다. 당나귀는 홀로 남겨져 주변을 두리번 살피는데 저기 쓰러진 참나무 뒤에 누워서 자고 있는 동물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렇게 동경했던 사자다. "사자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사람들이 사자님을 찾고 있어요" 소리쳤는데 반응이 없다. 사자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사람에 대한 증오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사자에게 위험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사자에게 다가갔는데 죽은 사자였다. 죽은 사자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사자를 본 건 처음이다. 더 가까이 가서 살펴봤더니 사자 가죽만 남겨진 채로 있다. 아마도 가죽을 벗기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급하게 자리를 떠난 듯싶다. 수컷 사자라 그런지 갈기도 풍성하고 근사하다. 당나귀가 상상만 하던 바로 '그 사자'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저 멀리 저수지에서 주인이 걸어오고 있다. 저 멍텅구리 주인한테 벗어나고 싶다. 어디든 숨을 곳을 찾고 싶은데... 에라 모르겠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썼다. 주인은 사자탈을 쓴 나를 보자마자 자기 당나귀고 짐이고 뭐고 생각도 안 하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러면 그렇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당나귀는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주인에 실망하며 중얼거렸다.


 막상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긴 했지만 너무 무거운 데다 다리도 온전치 않아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양반걸음'으로 어그적 어그적 걷는데, 늑대와 곰같이 평상시엔 쳐다도 못 볼 무서운 동물들이 내 앞에서 감히 시비도 걸지 못한다. 멍청한 당나귀라 매번 무시하던 양이나 토끼 같은 하찮은 녀석들은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눈을 깔고 무조건  반대방향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래 이런 기분이구나. 존재감이란 이런 거구나!' 당나귀는 그 기분에 취해 산속을 거닐었다. 물론 소리를 내면 정체가 탄로 날까 봐 묵묵히 걸어 다녔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동물들이 수군거렸다. "저 사자는 뭔가 다른 것 같아. 소리도 안 내고, 뛰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걸어 다니는데도 카리스마가 어마어마하던데..." 소문이 소문을 낳아 언제부턴가 숲 속에선 '침묵의 고독한 신사'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또한, 내가 사냥을 하거나 식사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으니 은근히 초식동물 중에 팬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비록 새벽이나 밤늦은 시간에 주변을 살피며 풀을 뜯어먹는 게 불편하긴 했지만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기분 좋은 요즘이다. 


 어느 날 도저히 풀만 뜯어먹기엔 한계에 다다라 밭에 들어가 당근을 몰래 뽑아먹고 있는데, 마침 밭으로 올라오던 동네 주민들과 맞닥트렸다. 난 그저 겁이 나서 밭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서두른 건데 사자 가죽이 너무 무거워 갈지자로 걷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밭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예전 같으면 내가 등장만 해도 달아났을 사람들이 최근 사자 사냥으로 사자가 익숙해졌는지 겁이 없어졌나 보다. 도망가지 않고 지켜보다가 단체로 달려들었다. 난 사자처럼 크게 포효하며 사람들에게 겁을 줬다. 그러데 사람들의 표정이 애매하다. 그건 마치 가창력을 인정받던 가수가 사실 립싱크였다는 걸 알았을 때 짓는 그런 표정이었다.


 한편, 바람은 오늘도 한량처럼 산속을 천천히 거닐고 있는데 아래를 보니 사자가 밭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구나. 사자 녀석이 괘씸하기도 하고, 실상은 그냥 심심해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강풍 모드로 시원하게 바람을 날렸는데... 이게 웬일인가? 사자 가죽이 통째로 벗겨졌다. 대머리 총각이 가발 벗겨지듯 사자 가죽이 시원하게 벗겨지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한 마을 사람과 한순간에 실체가 드러난 당나귀 모두 깜짝 놀랐지만, 그중 제일 놀란 건 바람이었다. '아니 내 힘이 이 정도인데… 몇 년 전 그 태양과 대결에서 그 낡은 외투를 입은 나그네는 도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뒤끝이 길기로 유명한 바람은 여전히 태양과 대결했던 그때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 '혹시 그 나그네는 사람으로 변장한 제우스 신이었던가! 소름 소름!!!'


 당나귀는 이제 현실을 깨달았다. '침묵의 고독한 신사'가 아닌 사람들과 동물들이 비웃던 그 당나귀로 돌아왔다는 것을. 이제 남은 건 도망 밖에 없다. 농부들이 달려오자 당나귀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려갔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저 멀리 바닷가 선착장이 보인다. 눈에 보이는 아무 배에 뛰어들다시피 타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배는 지중해를 넘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배였다. 당나귀는 망망대해 바다를 바라보면서 다짐했다.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그곳에선 사람들이 나를 '사자'처럼 두렵고 경외하는 존재로 보이게 만들겠어. 두고 보라고!'

   



 유대인 속담 중에 '당나귀는 예루살렘에 가도 당나귀'라는 말이 있다. 멍청한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항상 멍청하다는 뜻이다. 이솝 우화만 보더라도 당나귀와 연관된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이솝 우화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당나귀 = 멍청이', '고집이 센 동물'과 같은 선입견이 생기게 되었다. 이 후로 '곰돌이 푸우', '슈렉' 등에 등장하는 당나귀를 보더라도 전형적으로 우둔하거나 수다스럽고 경박한, 고집이 센 동물로 인식하고 있다.  


 당나귀는 유럽이나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선 운송 수단으로 실생활에 밀접하게 자리 잡은 가족 구성원의 일원으로 살아왔다. 사람이 다룰 수 없는 사자와 같은 맹수들과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동물보다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함께 해왔다. 그러니 당나귀 입장에선 억울할 만도 하다. 사람을 대신해 힘들고 어려운 일은 다하는데 멍청하다고 무시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실제로 당나귀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아이큐 60 정도에 수명도 60-70년이나 되니 인간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여길 만한 동물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선입견이 만들어졌을까? 아마도 자기만의 '고집'이 그런 이미지를 강화시킨 게 아닐까? "저 친구는 참 머리는 좋은데, 자꾸 꾀를 쓴단 말이야.", "아니 저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닌데 왜 저 부분에서 X고집을 피우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와 같은 평가를 받는, '당나귀 유형'의 직장 동료들이 종종 눈에 뜨인다. 게다가 '사자 탈'까지 쓰고 있으면 커뮤니케이션할 때마다 '참을 인'을 몇 번이나 써내야 한다.  


 그렇다면,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당나귀'와 같이 본인을 과대평가하고, 성공 지향적인 '야심가 유형'과 커뮤니케이션할 때 우리는 무엇을 주의하고, 어떻게 협업할 수 있을까? 


1. 적절한 불신도 하나의 방법이다

 인정받는 리더십은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신뢰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당나귀 유형'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도 않겠지만, 항상 예방 차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업무 이슈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사전에 제시하고 합의하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2. 구체적인 문제점을 정리해 준비하기

 꾀도 많고 고집도 센 '당나귀 유형'과 커뮤니케이션할 때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하기 위해 사전에 충분히 근거를 삼을 수 있을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자칫 이러한 작업이 상대방을 흠집 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항상 변화와 개선을 위한 목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감정적인 단어 사용에 신경 쓰면서 커뮤니케이션할 필요가 있다.


3. 구체적인 개선 방향 없이 뛰어들지 말기

 대안 없이 문제점만 지적하면 오히려 그럴싸한 반박과 역공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당나귀가 소금장수에게 "왜 소금이 녹을 가능성이 이렇게 높은데, 사전에 준비도 안 하고 나를 강에 몰아세웠나요?"라고 논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대안이나 개선 방향을 철저히 준비해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 문제점만 지적하면 분명히 부정적인 반응과 함께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변명으로 일관하게 되어 효과적인 대화가 일어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이야기해도 마음만 상하고 대화가 단절될 수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런 사람과 일할 기회를 만들지 않으면 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또한, 사람들을 그렇게 정형화된 유형으로 나눌 수도 없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때론 친절한 내 친구도, 남자 친구(혹은 여자 친구)도, 직장 상사도, 하물며 나 역시 특정 상황에서 고집 센 '당나귀'로 돌변할 수 있다. 


 끝으로, 예루살렘으로 간 '그 당나귀'는 어떻게 되었을까? 더 힘든 주인을 만나서 죽도록 고생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를 태운 당나귀'가 되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경험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당나귀가 그 고집을 꺾지 않는 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끈기와 고집의 차이점은 끈기는 강한 의지에 근거한 것이요,
고집은 강한 공상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  헨리 워드 비처(미국 목사/노예 폐지 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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