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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경 Oct 02. 2022

전쟁 속에서 태어난 아기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엄마는 어렸을 때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다. 학창 시절도 학교나 친구와의 추억보다 일한 기억이 더 많다고 했다. 장사하는 외할머니 대신 모든 살림을 도맡아 하며 학교를 다닌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가 안타까워진 건 내가 30이 넘어서였다. 그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엄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힘들어도 푸념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같이 육아를 하면서부터이다.     


1950년 9월 9일,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7일째 전주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전쟁 중에 아이를 낳은 산모도 태어난 아기도 얼마나 불안하고 황당했을까. 산모와 아기는 바로 나의 외할머니와 엄마이다. 엄마가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났다는 건 6,25 전쟁을 배웠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알게 된 때는 내가 아이를 가지고 서였다.     


나는 임신 사실을 알고 정확히 일주일 후부터 입덧의 전조를 느꼈다. 냄새가 유난스러웠다. 김치 냄새가 떠오르면서 김치가 먹고 싶었다가도 누군가 냉장고를 열면 역한 냄새가 느껴졌다. 나는 거실에 있었는데도. 입덧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나는 산송장처럼 되어갔다.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고 물조차 마실 수도 없었고 모든 냄새 심지어 곁에 오는 사람 냄새로 유난스러웠다. 입덧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주사를 맞으러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산부인과에 응급으로 입원했다. 주사를 맞고 다음날 초음파 진료를 받으면서 유난스러운 입덧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병원에서는 아기가 한 명이었다. 그런데 2주일 사이에 세포분열이 일어났다. 아이가 둘이 된 것이다. 의사는 세포분열이 일어나면서 입덧이 시작되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신경세포가 주로 생성되니 음식을 못 먹어도 아이에게 큰 영향이 없다고 걱정 말라고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원인을 알았기에 마음으로는 안심이 되었으나 육체적으로는 여전히 힘들었다. 입덧은 그 후로도 몇 개월 계속되었고 입덧이 끝나고는 끝없이 부푼 배로 활동의 제약이 심했다.     


임신 6개월쯤에 친정에 며칠 다녀오고 동네 슈퍼에 갔더니 슈퍼 아주머니는 내가 아이 낳으러 간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단태아를 임신한 임산부에 비교해 6개월부터 만삭이었다. 이 힘든 임신기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모성애가 아니었다. 친정 엄마의 보살핌과 시어머니와 남편의 도움으로 임신기간을 버텨냈다.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어야 진정으로 부모 마음을 알 수 있다며 '너도 똑같은 자식 낳아봐야 알지'란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 말은 진리였다. 나는 내 임신 기간이 힘든 만큼 친정엄마의 임신기간, 외할머니의 임신기간이 그려졌다. 엄마가 태어날 당시 엄마가 살던 지역은 전쟁이 직접적으로 휩쓸고 가진 않았지만 창문을 이불로 모두 가리고 촛불을 켠 상태로 외할머니는 아이를 낳았다. 산고의 고통과 전쟁의 두려움은 내가 짐작할 수 없는 크기였을 것이다. 고통과 불안함 속에서 태어난 아기는 역시 힘든 삶을 살았다. 결혼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시집살이는 어마어마했다.     


'여자는 임신 기간에 먹고 싶은 걸 못 먹으면 평생 한이 된다.'는 말은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들을 수 있다. 나는 임신 기간 내내 먹고 싶은걸 원 없이 먹었다. 몸무게가 30Kg 가까이 증가했다면 설명이 될까. 그 덕에 아이들은 쌍둥이치곤 훌륭한 몸무게로 세상에 나왔다.     


엄마는 입덧이 없었다. 아니 '먹덧'이라고 하면 될까. 밥하고 김치 빼곤 다 먹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새댁이 먹고 싶은 걸 다 챙길 수도 없었고 할머니의 시집살이는 어마어마했다. 아마 나 같으면 못 살고 나왔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핏줄을 임신한 며느리가 먹는 걸 아까워하는 시부모 밑에서 힘든 임신기간을 거쳐 나를 낳았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서부터 나는 엄마를 나의 보호자로만 여기지 않게 되었다. 나와 같은 삶을 사는 여자로 여기고 내가 누리고 있는 당연한 것들을 같이 누리지 못한 그래서 내가 채워져야 할 빈 공간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고 소중한 존재로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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