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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의 반발 (2)

< 살아내는 중 9>

by 모카레몬



반. 찬. 통.


싸움의 원인은 반찬통 때문입니다.


사실 부부싸움이란 게 별 것 없어요.

아주 사소한 것 때문에 불똥이 튀거나

눈동자에 레이저가 장전됩니다.






요즘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글을 꾸준히 읽어주셨다면 모두 알고 계시는 내용이죠.

그동안 모아 온 남편과 저의 책들은 대부분 대학 도서관에

기증을 하고, 옷장에 있는 옷들 절반이상 모두 처분했습니다.


그릇, 주방용품, 살림살이 가재도구들도 다이어트하듯 줄여가고 있지요.


그는 캐리어 2개에 모든 것들이 정리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캐리어 2개만 끌고 다니면 되게 끔요.

물론 모션 데스크와 컴퓨터와 노트북, 복사기는 남깁니다.

새롭게 모으고 있는 시집과 추가되는 책들 외에는 밀리의 서재로 몰아둡니다.


사실 미니멀라이프는 남편의 의견입니다.

처음에 저는 싫었거든요. 그런데도 묘하게 끌립니다.

줄여가는 맛이 담백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여전히 남기길 원하는 습성이

아직도 큽니다.






그 후,


먹는 음식도 점점 변해가고 있습니다.

올리브 오일과 견과류, 양배추는 식단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아요.

일인당 요구르트, 사과 한 개는 꼭 먹고

생선, 달걀, 두부, 닭가슴살, 콩을 직접 간 두유 등으로

단백질을 보충하지요.

사실 불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생채소나 과일과 야채를 많이 먹습니다.


접시 하나면 한 끼 식사는 끝이 납니다.


그런데요, 가끔은 된장찌개라도 끓여야 살 것 같은 날이 있잖아요.

며칠 전이 그런 날이었습니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오랜만에 비빔밥 재료를 볶고, 달걀 프라이도 부쳤지요.

깨도 톡톡 뿌리고 참기름도 넉넉하게 두르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남은 것들을 넉넉하게 담을 반찬통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유리 반찬통 3개는 냉장고에 있고, 락앤락 반찬통이 죄다 없는 겁니다.

진짜 단 한 개두요.

유리 반찬통은 남겨두고 종류별 락앤락 통은 한 두 개 씩 남기자고

분명히 얘기했는데...


몽땅 다 버린 겁니다.

제 싱크대 서랍이 사막처럼 텅 비어 있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제 의사도 묻지 않고 물건을 버릴 때랑 똑 닮았습니다.

반찬통 버릴 때 튀김젓가락, 몇 개의 칼, 주걱, 국자 등도

추려서 저 몰래 버렸습니다.

이럴 땐 그의 행동이 왜 이렇게 빠른지 몰라요.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1년에 한두 번도 안 쓰는 게 맞거든요.

근데 그게 심정상... 쓰게 될 것 같아서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오빠, 내가 락앤락 반찬통 추려놓은 걸 왜 버려!"

목청이 올라가요.

"어떻게 다 버려!" 서운함이 가득합니다.


남편이 깜짝 놀랍니다.

"그거 버리라고 해서 버렸는데!"

또 우깁니다.

"내가 언제 버리라고 했냐고..."

정말 어이상실입니다.






그는 다 버리고도 후회 없는 스타일입니다.

그야말로 모던모던한 걸 무지 좋아해요.

저는요, 남겨두면 그래도 쓸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버릴까 말까 여전히 망설이는 저를 보며 답답해하고

저는 못 버려서 안달 난 또 하나의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끝까지 못 버리고 보관하고 있는 것들은

저의 모닝페이지 노트들입니다. 수십 권을 버리고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몇 권들은 남편도 쉽게 손대지 못하는 것들이죠.

아마도 그걸 버리면 이혼 각입니다.^^

그 노트들은 제 글감 곳간이기도 해서요.


깨끗하게 비워진 서랍을 닫고,

마음속 서랍 하나를 열었습니다.

거기에는요,

남편의 고집과 저의 편견과 우리가 함께 꾸려 온

수많은 이견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지요.

이 목록들 중에 반찬통은 또 진공포장해서 넣어둡니다.

나중에 싸움거리로 평생 보존할 거예요.

다시 꺼내서 제가 불리할 때, 증거자료로 사용하기에 아주 편리합니다.


"내가 지금 마트 가서 반찬통 사 올게!"

그가 옷을 후다닥 입고, 제 눈치를 보며 최선을 다하려 애를 씁니다.

미안한 걸 알긴 아나봐요.

"오빠, 됐어. 반찬통 필요 없이 최대한 남기지 않고 해 보려고."

여기서 끝입니다.


우리는 반찬통 때문에 목소리를 높입니다.

비단 반찬통이 아닐지라도, 얼마나 다른 것들이

마음을 엇갈리게 했을까요.

그럼에도 결국에는 같은 냉장고를 열어보는 사이입니다.

살아온 세월이 참 기특하지요.

함께 손 잡고 기도한 날이 없었으면, 이렇게 못 살았을지도 몰라요.


반찬통이 없어도 반찬은 있고

이견은 있어도 이해를 하게 됩니다.


락앤락은 없어도 락앤락한 부부지요.


결론은

호르몬보다 무서운 게

락앤락이었다는 겁니다.


호르몬의 반발은 없었지만

반찬통이 반발했네요.



아이 없이 살아가는 중년 부부입니다. 누군가는 선택으로, 누군가는 상황으로 부모가 되지 못합니다. 저희 부부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지요. 아마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자녀양육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연재글은 '아이 없음'에 대한 내용보다 아이가 없어도 살아지는 중년부부의 일상 기록입니다. 저출산 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중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삶의 결이 닮은 분들에게 닿기를 소망합니다.

*자립청년과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글벗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부부 #일상 다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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