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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복수의 목록

< 살아내는 중 11 >

by 모카레몬



가끔


그에게

섭섭하고 억울하고 공감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꺼내 쓰는 목록이 있어요.

일명 <그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는 방법>입니다.


근사한 표지나 맛깔난 메뉴판처럼 꾸며진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제 머릿속에만 있는 것들이죠.

그의 행동들이 반복되고, 그 안에서 제 마음도 학습되다 보니

어느새 저만의 공식이 생겼습니다.


A=A1 , B=B2 , C=C3, D=D4, E=E5.... 같은 일련의 작은 공식들이죠.


예를 들면요



A1.

그가 약속을 해놓고 말을 바꿀 때,

이유가 타당해도 섭섭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럴 땐,

그가 좋아하는 달걀 프라이를 뺍니다.

대신 두부의 양을 늘리고, 곁들일 소스나 요구르트는 없습니다.

같은 메뉴 같지만,

제 두부 밑엔 소스를 살짝 깔아 둡니다.

그것만으로도 제 마음은 조금 평평해집니다.



B2.

제가 중요하다고 여긴 말을 몇 번이나 흘려듣고

"언제?", "그랬어?"하고 물어올 땐

머리가 띵__할 정도로 야속합니다.

계속 반복되면 말이죠.


이럴 땐,

휴대폰 충전기를 제 서랍 속에 깊이 숨겨 둡니다.

아주 교묘하게요.

배터리 3%로 허덕이는 그를 어깨너머로 구경합니다.


물론, 끝까지는 가지 않아요.

충전기를 찾느라 허둥댈 때쯤, 애써 찾아주는 척합니다.


"오빠, 찾으면 얼마?"

".... "

"찾으면 얼마?"

다섯 개 손가락을 활짝 펴는 걸 보면, 슬슬 서랍에 둔 충전기를

꺼내 옵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되지?"

"숨겨 둔 거지?"

그도 모른 척하고, 오만 원 한 장으로 휴대폰을 살립니다.



C3.

그는 제가 중요하다고 부탁한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맞아요, 잊어버릴 수 있는데... 종종 그러면 섭섭하죠.


비앙카 피존향이 나는 부드러운 수건 대신

표면이 다소 거칠고 뻣뻣한 수건을 내줍니다.

주는 대로 사용하는 그에게 살짝 미안하지만,

그렇게라도 제 마음을 달랩니다.



D4.

그가 너무 바쁠 때, 저를 좀 뒤로 미룰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해하지만, 너무 무심해질 때가 있죠.

그럴 땐,

깊은 잠에 빠진 그를 확인하고

10개 발가락에 빨간색 매니큐어를 칠해둡니다

신혼이 한 참 지난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한 방법입니다.


이른 아침,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출근하는 그를 바라보며

웃음을 씨_익 흘렸지요.


문제는 그날 저녁,

퇴근 후 사우나에 잠깐 들렀던 그가

탕에도 들어가지도 못한 채

빨간 발가락을 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는 거죠.


그날 밤은 둘 다 등을 돌리고 잠들었습니다.

그 뒤로는, 그의 품위를 생각해

그 방법은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E5.

저와 의논하지 않고 통보할 때입니다.

가끔 중요한 일을 혼자 결정합니다.

이럴 땐, 존중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화가 많이 나지요.


차 키를 무조건 숨기고, 찾아주지도 않습니다.

시치미를 떼는 건 무척 어렵지만 저의 소심한 복수입니다.

대중교통을 잘 이용하는 그이지만

차가 정말 필요할 때라도 모른 척하는 것은

꽤 통쾌합니다.

마음이 풀리면, 원래 키가 있던 자리에서

몇 칸 벗어난 서랍장에 무심히 넣어 둡니다.



그 외, 더 있습니다만... 생략합니다.






소심한 복수의 목록은

사실 그를 향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 만들어 둔 저만의 숨구멍입니다.


부부란

아주 많은 숨구멍을 만들어가며

같은 공기 속에서 오래 사는 사이니까요.


수많은 대화 속에

바람과 기대와 사랑과 원망이 오갑니다.

쌓여 온 감정의 켜들은 따스하지만

때로는 아프고

애틋하지만

때로는 기분 상하기도 하죠.

그런 것들은 아주 소소하고 사사롭습니다.


그는 아마 모를 겁니다.

일일이 다 펼쳐 놓기 전에는요.

그를 향해 얼마나 작은 저항과 작은 용서를 반복해 왔는지...

그러나 저는 또 압니다.

그 역시 저를 향해

얼마나 많은 작은 저항과 작은 용서를 반복해왔는지를요...


소심한 복수를 가장한

조용한 화해의 연속은

우리 부부가 살아내고 있는

아주 세련된 사랑의 스킬 중 하나입니다.



그가 이 글을 읽고, 자신에게도 목록이 있었노라고 고백합니다.

흠... 저도 알고 모른 채 한 것도 있고, 완전히 몰랐던 것도 있습니다.

새롭게 알게 된 그와 나의 목록들은 이제 활용하지 못할 듯 싶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에베소서 4:2)


아이 없이 살아가는 중년 부부입니다. 누군가는 선택으로, 누군가는 상황으로 부모가 되지 못합니다. 저희 부부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지요. 아마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자녀양육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연재글은 '아이 없음'에 대한 내용보다 아이가 없어도 살아지는 중년부부의 일상 기록입니다. 저출산 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중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삶의 결이 닮은 분들에게 닿기를 소망합니다.

*자립청년과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글벗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진출처> pixabay

#부부 #복수 #목록 #사랑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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