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내는 중 12>
청소기를 돌리다 보면, 언제나 나타납니다.
머리카락들 말이죠.
남성용, 여성용 함께요.
빠질 때는 몰랐는데,
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은 참 뚜렷합니다.
이 가늘고 작은 것들이
온 사방천지에서 널려 있는 겁니다.
그의 머리숱은
진행형을 지나
이제 거의 에필로그 단계를 향해 갑니다.
시아버님도 그랬습니다.
결혼 초, 처음 인사드렸을 때
시아버님의 머리숱은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은 듯 보였거든요.
늘 웃으며 말씀하곤 했습니다.
"내 머리숱이 좀 군더더기가 없어.
머리 감고 말리는 시간이 금방이야."
그 말씀 속엔 약간의 민망함과
아주 괜찮은 여유로움이 섞여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늙어가는 것에 대한
아버님 특유의 지혜였던 것 같습니다.
덧없음과 작별하는 법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죠.
아, 이건 그냥 외형적 문제가 아니라
유전이겠구나...
내 남편도 이 길을 따라가겠구나.
아니나 다를까요...
40대 들어서면서 M자형으로 살짝 길이 나더니,
정수리까지 슬슬 개방되기 시작합니다.
전 이미 그전부터 모발치료를 어르고 권했지요.
아, 그런데 말입니다...
막무가내입니다.
"생긴 대로 살지, 뭐 하러!"
아니, 머리카락이 계속 빠지고 있는데
"나는 머리가 빠져도 멋있어."라고 말합니다.
무슨 근자감일까요...
치료할 수 있었던 그 좋은 시기를 다 보내고
이제야 병원 가서 두** 처방을 받아 복용하고 있습니다.
세 달, 복용했음에도 효과가 꽤 있으니
진작에 예방차원으로 치료를 했다면 더 괜찮았을 텐데 말이죠.
"지금도 안 늦었어!"
그는 이렇게 태평합니다.
다행이긴 해요.
머리카락도 두꺼워지고 새로 나니까요.
저는 그의 이런 면이 부럽고 좋습니다.
느긋하고 여유가 있는 면이요.
머리카락은 빠지지만,
그는 여전히 태평합니다.
제가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난 탈모가 아니라, 헤어스타일이 변하는 중이야!"
라고 자신 있어하는 그가 참 좋습니다.
머리카락이 줄어드는 속도와
그의 느긋함은 반비례합니다.
그러고 보면 시아버님도 그러셨습니다.
머리카락은 이미 하산길을 달리고 계셨지만
낙천적인 웃음만큼은 꼭대기에 계셨지요.
아버님만의 작은 위트 속에
긍정적이고 호탕하며 낙천적인 멋이 있으셨습니다.
저 또한 머리카락 두께가 많이 얇아지고,
빠지는 개수도 늘어나고 있어요.
전 머리카락 이야기가 매우 신중하고
그는 안중에도 없지요.
바닥에 널린 머리카락들을 보며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들은
우리의 젊음이기도 하고
우리의 오만함이기도 하고
때론 우리의 걱정거리이기도 합니다.
머리카락은 지속적인 퇴사 중이지만
사랑은 여전히 정규직이고
일상의 소소한 웃음은 계약 연장 중입니다.
청소기를 누가 돌리든
함께 살아온 날들의 증거이자
변화해 가는 시간을 기록하는
작은 깃발 같은 머리카락들.
머리카락이 빠져도
사랑은 휑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아이 없이 살아가는 중년 부부입니다. 누군가는 선택으로, 누군가는 상황으로 부모가 되지 못합니다. 저희 부부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지요. 아마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자녀양육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연재글은 '아이 없음'에 대한 내용보다 아이가 없어도 살아지는 중년부부의 일상 기록입니다. 저출산 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중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삶의 결이 닮은 분들에게 닿기를 소망합니다.
*자립청년과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글벗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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