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내는 중 13>
며칠 전, 여름맞이로 에어컨 점검을 받았습니다.
좀 이른 감이 있지만, 미리 점검을 받지 않으면 대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올해는 여름 준비를 끝냈습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우리 집은
아주 은근하고 질긴 전쟁을 시작합니다.
저는 더워서 리모컨을 찾고
그는 추워서 리모컨을 숨깁니다.
저는 20도를 눌러 놓고
그는 26도로 몰래 올립니다.
숫자는 고작 6도 차이지만
기분은 거의 남극과 사하라의 전쟁입니다.
"오빠, 너무 더워. 에어컨 좀 시원하게 틀자."
"난 추운데. 이게 덥다고?"
이 대사는 여름마다 복붙(복사, 붙이기)입니다.
선풍기를 같이 틀면 됩니다.
전 그게 싫거든요.
그냥 에어컨 바람을 실컷 쐬고 싶어서요.
더운 것은 정말 싫습니다.
이중적이지만 여름은 화끈하게 더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는 여름에도 따뜻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 상식으로 도저히 납득 불가지만,
한 여름에도 한증막이나 온천이나 찜질을 사랑하는 그이기에
뭔가 이해는 됩니다. (아주 억지로요.)
그런 그가 살짝 부럽습니다.
계절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저 강철멘털을요.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습니다.
한 번은 제가 슬쩍 에어컨 온도를 낮췄습니다.
22도로요.
그는 귀신같이 알아챕니다
"또 낮췄지?"
"아니, 기분 탓이지 않을까?"
이미 리모컨은 숨겨두었습니다.
에어컨의 온도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고
우리의 온도는 늘 타협의 미학입니다.
여름밤도 마찬가지입니다.
얇은 이불조차 저는 걷어차고
그는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립니다.
같은 침대 위에
계절의 경계선이 생깁니다.
저는 열대야 속에서 잠을 청하고
그는 가을밤처럼 지냅니다.
같은 집, 다른 계절.
이게 우리 부부의 한 여름 공식입니다.
근데 가만 보면요,
온도만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성격과 취향의 차이
취미와 강점의 차이
식성과 입맛의 차이
습관과 성향의 차이
기질과 본성의 차이
노력과 재능의 차이....
우리 안에는 수많은 계절이 교차합니다.
부부라는 건
어쩌면 서로의 계절을 맞춰가는 게 아니라
서로의 계절을 인정해주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같은 집에서 산다는 건
결국 같은 마음 안에 산다는 거지요.
그의 호르몬이나 신체적 변화가 거의 없다면
아마 이번 여름도 또다시
에어컨 리모컨 쟁탈전이 시작될 것입니다.
온도 차이 때문에 또 서로 불편하겠지만
묘하게 익숙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온도는 늘 다르지만
함께 노화해 가는 속도는
비슷하게 맞을 것 같습니다.
이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아이 없이 살아가는 중년 부부입니다. 누군가는 선택으로, 누군가는 상황으로 부모가 되지 못합니다. 저희 부부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지요. 아마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자녀양육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연재글은 '아이 없음'에 대한 내용보다 아이가 없어도 살아지는 중년부부의 일상 기록입니다. 저출산 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중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삶의 결이 닮은 분들에게 닿기를 소망합니다.
*자립청년과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글벗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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