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짓는 문장 78.
이미 충분한 것들로도 하루는 잘 이어진다
Even with what is already enough,
the day finds its way forward.
돌이켜보면 먹는 것뿐 아니라 삶의 방식도 밀어붙여 채우는 쪽에 가까웠다. 이미 넉넉한데도, 그 '충분함'을 믿지 못한 채 바쁘게 움직였다. 더하지 않아도, 이미 있는 것들로 하루는 잘 이어진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먼저 눈에 걸리는 것들이 있다.
한동안 그것들을 뒤로 밀어두는 쪽을 택해왔다. 금방 먹을 수 있는 것들, 바로 손이 가는 것들부터 꺼내 쓰고 애매하게 남은 것들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다시 손대기에는 조금 망설여지는 것들이 냉장고 구석에 오래 머물렀다.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한 후, 무엇보다 식탁이 단순해졌다. 가열하는 시간을 줄이고 샐러드를 자주 먹는다. 씻고 뜯고 썰어 담으면, 그걸로 한 끼가 된다. 프라이팬이나 냄비를 꺼내지 않아도 되는 날이 많아졌다. 준비하는 시간도 짧아졌고, 식탁 위도 단순하다. 불 앞에 서 있을 일도 별로 없다. 손님이 와도 한 끼를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덜어내고 나면, 마음도 같이 가벼워진다.
밥심은 불변의 진리다. 밥과 국만 있어도 한 끼는 해결되고, 비빔 나물 몇 종류만 있어도 양푼에 비벼 먹으면 끝이다. 그럼에도 간단한 한식을 먹어도 냉장고는 자주 열게 된다. 구석에 남아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남은 두부, 숨이 죽은 부추와 콩나물, 거뭇한 점이 올라오는 무, 물렁해지는 당근과 양파가 풀이 죽었다. 쓰고 남겨둔 재료들은 제 때 사용하지 않으면 버리기 쉽다. 양이 얼마 남지 않은 튀김가루, 메밀가루, 전분가루, 마늘가루도 수납장에 엎드려져 있다. 참치액, 느억맘, 까나리 액젓, 홍게액도 고루 줄어들고 있다.
남아 있는 것들을 정리하는 날은, 조리법도 다양해진다. 삶고, 데치고, 굽고, 볶으면서 부엌이 다시 분주하게 움직인다.
'냉장고 뿌시기'로 끼니를 해결하면 몸도 가뿐해진다. 장에 가서 새로운 것들을 냉장고에 채워 넣기보다, 이미 있는 것들을 깨끗하게 없애는 것이 더 좋다.
어릴 때, 우리 집 상은 빈 곳이 없이 꽉 찼다. 밥과 국은 기본이었고, 장독대의 장아찌들과 그날그날의 반찬이 더해졌다. 제사 전날이면 부엌 바닥에 신문지가 깔렸고, 접시들이 줄을 맞춰 놓였다. 엄마는 이미 가득 찬 접시 위에 한 젓가락을 더 올렸다. 밥도 고봉이지만, 그릇보다 내용물이 높이 쌓였다. 부족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그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이었다.
상은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어 보이면 안 된다고 믿었다. 이미 충분한데도 하나를 더 얹고, 괜히 덧붙이는 쪽이 익숙했다. 그래야 제대로 먹는 것이고 하루가 제대로 놓인 것 같았다. 신혼 때부터 식사는 늘 그렇게 챙겨 왔다. 친구가 대충 먹고살라고 했던 말이 게으르게 느껴졌던 시절이다.
돌이켜보면 먹는 것뿐 아니라 내 삶의 방식도 밀어붙이며 채우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부족함을 밀어내고, 빈자리를 가려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이미 충분한데도, 그 ‘충분함’을 믿지 못한 채 손을 한 번 더 움직였다.
남아 있는 것들로 한 끼를 차려내는 날이면 마음도 정돈된다. 재료를 더하지 않아도 충분한 끼니. 이미 냉장고에 있는 것들로 최대한 활용한다. 지금도 여전히 꼭 있어야 할 재료가 있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마트로 뛰어가는 사람이다. 그 습관이 흔적처럼 남아있지만 이제는 생략한다.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냉장고 문을 연다. 안쪽에서 흐르는 찬 공기가 살갗에 닿는다. 앞줄보다 구석을 먼저 건드리는 손에 당근이 들린다. 부드럽게 물러진 당근 하나를 꺼내 들고, 잠시 그대로 서 있다.
불을 켜지 않은 부엌이 냉장고 불빛으로 환하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6:6~8)
글벗 되어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한 밥상으로 몸도 마음도 가벼운 날 보내세요♡
대문사진. pixabay.
사진. by mocalem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