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양치기의 문상객』 작품을 을 보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이 그림에는 관과 개 한 마리만 있다.
말해줄 사람도, 위로해 줄 얼굴도 없다.
죽음은 이미 끝났고, 남은 것은
기다림뿐이다.
개는 관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애도다.
울부짖지 않고,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지킨다.
1837년에 Edwin Landseer 가 그린 이
작품은 죽은 늙은 양치기의 관 곁을
지키는 양치기로 훈련된 개 한 마리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사람의 모습은 화면에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개의 자세와 표정만으로 죽음과 애도의
정서를 전달하고 있다.
애드윈 랜시어는 동물화가였다.
동물을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감정을
지닌 주체로 그렸다.
그의 작품의 중심인물은 바로 '개'였다.
개는 관 옆에 몸을 낮춘 채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는 슬픈 자세다.
이는 충성, 상실, 침묵의 슬픔을 상징한다.
주변의 배경 요소에는 지팡이·망토·양치기
도구 등이 있다.
화면에 놓인 소품들은 죽은 주인의 삶을
암시한다.
특히 지팡이는 생의 여정을 마쳤음을
표현하고 있다,
망토는 부재의 흔적을 상징한다.
절제된 갈색과 회색 계열, 그리고 부드러운
명암의 대비는 과장 없는 애도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사람이 없는 애도의 장면,
장례 장면에서 인간을 배제하고 개만을
남김으로써, 랜시어는 애도의 본질을 감정
그 자체로 환원하였다.
빅토리아 시대에 이상화된 덕목인 충성,
의무, 정서적 절제는 개의 태도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울부짖음이나 극적인 제스처가 없어도,
고요한 자세가 오히려 상실의 깊이를
강조하고 있다.
애드윈 랜시어는 이 작품을 통해 동물화의
격상을 이뤘다.
동물은 장식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동일한
감정 서사를 전달하는 존재임을 제시하였다.
빅토리아 시대 관람객에게 이 작품은 도덕적
교훈과 감정 이입을 동시에 제공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늙은 양치기의 문상객'은 죽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충성과 상실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전달하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랜시어의 사실적 묘사력과 정서적
통찰이 결합된 대표작으로 높이 평가된다
작품에서 사람이 없는 장면은 부재의 강조
였다.
그래서 더 아프다.
관은 있으나 주인은 없다는 것,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남겨짐'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개는 인간과 이해관계가 전혀 없다.
보상도 없고, 약속도 없지만 그럼에도 남아
있는 존재였다.
관계의 끝에서 드러나는 것은 '충성'이라는
미덕이 아니라, '함께였다'는 시간의 무게다.
이 그림 앞에서 관객은 질문을 받는다.
누가 마지막까지 남는가.
우리는 떠난 뒤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말 없는 애도는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침묵을 건넨다.
그 침묵은 각자의 기억을 불러온다.
떠나보낸 사람,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순간들.
그래서 이 그림은 개인의 경험만큼이나
다르게 아프다.
가슴이 먹먹해진 이유는 분명하다.
이 작품은 슬픔을 보여주지 않는다.
슬픔이 남아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https://suno.com/s/3FmXgWLUXv4NaaaE
늙은 양치기의 문상객
작사:콩새작가
작가:수노
1절
낡은 오두막 불 꺼진 밤
발자국 소리마저 잠든 곳
주인 없는 지팡이 옆에서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어
담요 끝에 남은 온기
이름 부르던 낮은 목소리
세상은 조용히 떠나가도
너는 내 안에 머물러
우~~~
아, 돌아오지 않는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문을 지켜
말하지 않아도 알잖아
사랑은 여기, 끝나지 않았다는 걸
2절
창문 틈으로 스미는 새벽
양들의 숨결, 멀어진 하루
관 옆에 고개를 묻고서
나는 마지막 밤을 새워
눈물 대신 고요를 남기고
충성은 말이 되지 않아
너를 향한 이 기다림이
내 삶의 전부였다는 걸
우~~~
아, 시간이 나를 지나가도
나는 여길 떠나지 않아
이별이 이름을 바꿔도
사랑은 남아, 그림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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