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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ug 30. 2022

낭만가도에 남은 로마의 향기 아우크스부르크

긴 역사의 숨결을 여전히 느낄 수 있다

아우크스부르크 전경


독일 바이에른 주의 3대 도시에 속하는 아우크스부르크는 기원전 15년에 세워지면서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었다. 원래는 로마제국 군대의 기지가 있던 곳인데 이를 기초로 하여 도시가 건설된 것이다. 초기의 명칭은 Augusta Vindelicum이었다. 중세 때는 신성로마제국의 주요 도시로 중요한 회의가 자주 열린 곳이기도 하다.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시기인 1555년에 바로 이곳에서 유명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Augsburger Religionsfriede)가 이루어졌다. 이 화의로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제후들은 루터교나 가톨릭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종교 자유가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칼뱅을 추종하던 기독교인들은 1648년 베스트팔리아 화의 (Westpfälicher Friede)가 맺어질 때까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독일의 여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우크스부르크도 30년전쟁 (1618~1648)을 피해 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다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맞서는 9년 전쟁 (1688~1697)이 이 지역을 휩쓸고 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15~16세기 유럽 금융과 금속 거래의 중심가 역할을 한 아우크스부르크는 번성하여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또한 산업혁명기에는 섬유산업이 발달하여 다시 한번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도시도 영고성쇄를 거듭한다. 그런 세월의 풍상을 이겨낸 ‘어른’이 존경을 받는 것처럼 역사의 단련을 받은 도시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마련이다. 아우크스부르크 또한 그런 대열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하겠다.   


아우크스부르크 시내 거리


산업이 상당히 발달한 도시이지만 그와 동시에 독일에서 자연환경이 가장 잘 보존된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빛과 소음 공해에서도 가장 잘 보호된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우크스부르크에 가보면 누구나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우크스부르크는 2013년에는 '지속 가능한 대도시 상'을 수여하기도 하였던 도시답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지형적 특성으로 날씨 변화가 무쌍해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 많다. 그러니 시내 관광을 할 때에 반드시 우산을 챙기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유서 깊은 도시인만큼 볼거리도 당연히 많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1620년에 지어진 시청 건물 옆에는 989년에 지어진 감시탑인 ‘페를라흐투름’ (Perlachturm)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낭독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perlago’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 이 탑 앞에서 공문서가 공표되곤 했기 때문이다. 이 탑 아래 창문에는 성 미카엘 대천사가 악마를 물리치는 모습의 조각상이 서 있다.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인 9월 29일이 되면 이곳에 아이들이 모여 미카엘 대천사가 악마를 창으로 찌를 때마다 숫자를 세는 관습이 있다. 그리고 이 축일이 낀 주일에는 아이들을 위한 큰 잔치가 시청 광장에서 벌어진다. 약 70m 높이의 이 에 오르면 시내를 조망하기에 적당하다.

   

페를라흐투름과 아우크스부르크 시청 건물

 

많은 교회 건물 가운데 9세기에 지어진 아우크스부르크 대성전과 1321년에 지어진 내부 장식이 매우 아름다운 성안나 (St. Anna) 성당은 꼭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빈민들을 위한 사회주택 단지인 프게라이 (Fuggerei)도 있다. 1561년 야콥 푸거 (Jakob Fugger)가 지은 것으로 1523년 52채의 집으로 늘어났다. 그 이후에 더 확대되자 아예 이 지역에 자체적인 도로와 교회도 지어졌다. 야콥 푸거를 기념한 동상을 보면서 이 동네를 천천히 돌아보다 보면 독일의 사회복지 제도의 역사가 단순히 비스마르크에서 시작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게 될 것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현대인의 집단의식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소수의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나머지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힘을 모으는 데에는 설득이 필요하다.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을 사회적 무능력자들을 위하여 왜 써야 한다는 말인가? 더구나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어쩌면 평생 만날 일이 없을 사람인데 말이다. 그러나 특히 독일에서 근대적인 사회보장제도가 완비된 역사를 살펴보고 지금도 그 제도의 유지를 위하여 사회 전체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그러한 질문이 어리석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독일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러한 답을 굳이 묻지 않아도 눈으로 아니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특히 장애인을 위한 물리적 제도적 장치가 얼마나 정교하게 발달되고 적용되었는지를 알게 되면 선진국의 척도가 단순히 GDP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게라이 거리

 

다시 아우크스부르크로 돌아가 보자. 역사적인 기차들이 전시된 철도박물관 (Bahnpark)도 볼만하다. 1906년 지어진 이 박물관은 중앙역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융단폭격에도 살아남아 원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도시에서 늘 그렇듯이 여기에도 유명한 전설이 있다. 시 성벽 동쪽에는 실물 크기의 돌로 된 사람이라는 뜻의 ‘슈토니어르네 마’(Stonierne Ma)라는 이름의 팔 하나가 없이 방패를 들고 있는 한 남자 동상이 서 있다.  30년전쟁 시기에 가톨릭 군대에 포위된 성에 있던 한 개신교 제빵사인 콘라드 하케르 (Konrad Hackher)가 톱밥으로 빵 모양을 만들어 성벽 밖으로 던졌다. 사실 당시 성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빵을 버릴 만큼 넉넉하다고 적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화가 난 가톨릭 병사들이 활을 쏘아 그의 팔을 날려버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의 기만전술에 속아 가톨릭 군대는 포위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물론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지만 그의 동상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그 동상의 코를 만지면 행운이 운다는 속설로 그의 코는 완전히 검은색이 되어버렸다. 특히 한창 사랑에 빠진 커플들이 행운을 바라며 여기를 많이 다녀간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슈토니어르네 마 동상

 

시내 구경을 마치고 시간 여유가 있다면 레흐강 (Lech) 강변의 산책을 권한다. 목가적인 풍경에 로마제국 시절로 돌아가는 착각마저 들 것이다. 그런데 걷다 보면 어김없이 배가 고파지기 마련이니 여느 이방의 나그네들처럼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적당한 식당을 찾아야 하는 것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주변 지역까지 포함하면 인구가 거의 90만 명에 이르는, 독일 기준으로 볼 때에는 대도시이니 식당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볼거리가 많은 시내에서 찾아본다면 ‘페를라흐아흐트’ (Perlach Acht)라는 레스토랑을 권한다. 좋은 분위기에서 적당한 가격에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이탈리아 식당도 즐비하다. 그리고 인도, 중국, 일본, 월남 식당도 있다. 그러나 기왕 아우크스부르크에 왔으니 여기 토속 음식점을 들러 볼 만도 하다.  독일 여느 도시나 마찬가지로 시청 근처에 있는 ‘랏츠켈러 아우크스부르크’ (Ratskeller Augsburg)는 가격 대비로 우수한 아우크스부르크 시민들이 즐기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더 많은 정보는 어김없이 공식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참조: https://www.augsburg.de/)  이 사이트는 아우크스부르크 시 자체에서 운영하는 것이라 공식적인 시정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코로나 시기에 민감한 공개 행사에 대한 신뢰할만한 행정적 조치 안내가 실시간으로 올라와서 여행객들도 뜻하지 않게 당황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아우크스부르크를 방문하기 전에 이 사이트에서 필요한 믿을만한 정보를 구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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