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서남부를 훑어보며 충분히 힐링을 했으니 이번에는 독일의 젖줄인 라인의 강변을 따라 서부로 가본다. 이른바 라인 낭만길 (Route der Rheinromantik)이다. 이 길은 쾰른에서 시작하여 마인츠에서 마무리되는 약 360km 정도 되는 짧지 않은 여정이다. 그러니 긴 호흡으로 천천히 달려보자. 로마제국의 식민지 시절부터의 흔적이 여전히 남은 이 길은 그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적 유적으로 독일 사람들도 즐겨 찾는다. 먼저 출발지인 쾰른을 알아보자. 쾰른 (Köln)이라는 이름은 로마제국의 식민지라는 의미의 Colonia Claudia Ara Agrippinensium (CCAA)에서 나왔다. 직역하자면 ‘클라우디우스 황제 (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10BC~AD54)의 식민지이며 아그리파 제단이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Augustus, 63BC~AD14), 티베리우스 (Tiberius Caesar Augustus, 42BC~AD37) 칼리굴라 (Ga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AD12~41)를 이어 서기 41년부터 제4대 황제로서 로마 제국을 13년 동안 통치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였던 아그리파 (Marcus Vipsanius Agrippa, BC64~12)는 기원전 19년 이 지역을 점령한 로마 장군으로 로마를 본떠 쾰른 도시를 설계한 인물이다. 그가 통치하던 시절인 서기 50년에 쾰른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이때 그는 로마 시민들을 바로 이주시킨 것이 아니라 이 지역에 살던 우비어족 (Ubier)이 먼저 도시를 세우도록 지시하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흉상
그 이후 로마 시민들도 이 지역으로 이주해 정착하게 되었다. 그 당시부터 쾰른은 ‘라인강 하류’ (Germania inferior), 곧 오늘날 독일의 라인란트-베스트팔렌,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 통치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당시 로마제국이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었기에 쾰른은 그 문명을 라인강 지역에 전파하는 일종의 거점 역할을 한 셈이다. 그래서 이 도시도 로마처럼 최신식 계획도시로 건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쾰른의 이름에서 로마제국의 식민지라는 의미를 찾기에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다. 이제 쾰른은 로마보다는 근세 독일제국의 향수가 더 강하게 남은 곳이다.
중세에 들어와서도 쾰른은 그 중요성을 잃지 않았다. 455년 프랑크족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쾰른은 로마를 벗어나 프랑크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치자가 바뀌어도 로마 시민들과 프랑크족은 공존하면서 문화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메로빙거 왕조 (Merowinger, 509~751)가 끝날 무렵에 쾰른은 왕들의 통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카롤링거 왕조 (Karolinger, 751~987)에 들어서면서 쾰른은 가톨릭의 중심지가 되어 쾰른 대교구의 대주교좌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가 되었다.
12세기 무렵에 쾰른은 인구가 4만 명에 이르는 독일어권의 최대 도시로 성장하였다. 이 도시를 수호하기 위한 방벽 공사는 1180년에 시작되어 1250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는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방벽이었다. 파리에도 비슷한 방벽이 있었는데 길이가 7.5km에 불과하여 쾰른 방벽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 방벽은 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수상인 아데나워가 태어난 19세기 말 도시 확장을 위하여 철거될 때까지 오랜 세월 쾰른을 수호하는 상징이 되었다.
또한 12세기부터 쾰른은 도시 이름에 성 (Sancta)이라는 호칭이 붙은 4개 도시에 속하게 되었다. 나머지 3개는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폴리스. 로마였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Sancta Colonia Dei Gratia Romanae Ecclesiae Fidelis Filia으로 불렸다. 직역하면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은 도시 쾰른, 로마 교회의 충실한 딸’이다. 그만큼 가톨릭의 색채가 강한 도시였다. 그래서 쾰른 대성당이 1248년부터 지어진 것이기도 하다.
15세기의 쾰른 모습
그러나 시민들이 상품 교역권을 황제로부터 받아 라인에서 거래되는 물자의 매매를 할 수 있게 되어 부를 축적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된다. 1288년 보링엔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종결된 권력 싸움에서 가톨릭 세력이 패배하고 세속 귀족과 시민들이 승리를 거두면서 쾰른의 대주교는 종교 문제에만 권한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후 쾰른은 1794년까지 자유제국도시로서의 특권을 유지하게 된다. 그동안의 숱한 전란을 쾰른은 잘 버텨냈다. 1613년부터 30년 동안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든 30년전쟁도 쾰른은 별 탈 없이 넘어갔다. 결정적인 요인은 돈이었다. 쾰른을 공격하려는 세력에게 거금을 주며 잘 무마시킨 덕분이었다. 그 정도로 쾰른은 이른바 ‘부자 동네’였다. 그래서 독일 서부만이 아니라 전체 지역에서도 매우 수준이 높은 생활을 유지하는 도시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 돈을 자선 목적으로 쓴 것은 아니었다. 전쟁 중에도 무기 생산과 판매로 쾰른은 엄청난 돈을 쓸어 모았다. 그리고 전통에 맞게 종교개혁 이후에도 쾰른은 개신교의 공격을 잘 막아낸 가톨릭 도시로 남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쾰른은 고집불통의 ‘꼰대 도시’로 악명을 날리게 되었다. 근대의 정신이 침투하기 힘든 난공불락의 케케묵은 가톨릭 도시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쾰른은 그러한 ‘명성’이 영원하리라고 믿었기에 별로 근심하지 않았다. 가톨릭의 신이 지켜주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말이다.
그러다가 반가톨릭적인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에 점령당하면서 강제로 ‘개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때 쾰른은 별 저항 없이 프랑스에 항복하며 프랑스 공화국의 영토가 된다. 그리고 이 지역의 행정 수도는 더 이상 쾰른이 아니라 아헨 (Aachen)이 되는 굴욕도 기꺼이 감수한다. 그럼에도 나폴레옹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다. 사실 쾰른의 많은 시민들은 가톨릭의 정신에 신물이 나 있던 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반가톨릭적인 정책이 오히려 반가웠던 것이다.
1804년 나폴레옹 황제가 이 도시를 방문하자 쾰른 주민들은 모두 쏟아져 나와 열광적으로 환영을 하였다. 너무나 충성스러운 쾰른 시민의 태도에 감동한 프랑스는 1812년 나폴레옹 황제의 특명으로 쾰른에 ‘프랑스 제국의 훌륭한 도시’ (Bonne ville de l’Empire français)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선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 1815년이 되자 쾰른을 포함한 라인란트 지역은 프러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도시 이름도 Köln에서 게르만식 이름인 Cöln으로 개명하게 된다. 그러다가 나중에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다시 원위치. 곧 Köln으로 바뀐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초토화된 쾰른 전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연방공화국 곧 구서독의 초대 총리가 된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1876~1967)도 쾰른 출신이다. 그는 1917년 당시 최연소 쾰른 시장으로 당선된 이후 1963년 독일 수상에서 물러날 때까지 독일 정치계의 전설이 된다. 그러나 쾰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도심의 90%가 파괴된 것이다. 쾰른 대성당도 예외일 수 없었다. 전쟁 전의 77만 명의 시민이 전후에는 10만 명으로 크게 줄었다. 전후 1960년이 되어서야 다시 70만을 넘어섰다. 그 이후 현재의 100만 명이 되기까지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라인 강가의 쾰른 크란호이저 전경
유서 깊은 도시답게 쾰른은 여전히 상업의 중심이고 특히 예술의 도시이다. 1967년부터 시작된 Art Cologne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 행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원래 Universitas Studii Coloniensis라는 이름으로 1388년 개교한 쾰른대학교는 프랑스 점령기인 1789년 폐교를 당한다. 그래서 현재의 쾰른대학교 (Universität zu Köln)는 공식적으로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때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좋은 생각’ (Gute Ideen)을 교훈으로 하는 이 대학교는 여전히 1388년을 개교한 해로 기념하고 있다. 좋은 생각이다.
쾰른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흐르는 라인강 없이 이 도시를 생각할 수 없다. 로마제국 시대부터 강으로 운반되는 물자로 부를 축적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원래 라인강은 5개 지역으로 나뉘어 불린다. 보덴제 호수 (Bodensee)에서 흘러나와 스위스 바젤 (Basel)까지를 ‘호흐라인’ (Hochrhein), 여기에서 빙엔 (Bingen)까지를 ‘오버라인’ (Oberrhein), 다시 여기에서 본까지를 ‘미텔라인’ (Mittelrhein), 독일과 네덜란드 국경까지를 ‘니더라인’ (Niederrhein),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북해로 흐르는 지역을 ‘델타라인’ (Deltarhein)으로 부른다. 이 길이를 다 합치면 1,200km가 넘는다. 이 가운데 특히 아름다운 라인계곡이 바로 마인츠에서 쾰른에 이르는 지역에 있다.
주변 지역까지 합치면 쾰른은 900만 명의 인구가 사는 대도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라인강 덕분에 자연과 가까이할 수 있다. 쾰른 시의 13%가 숲으로 덮여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교세가 많이 줄었지만 강한 가톨릭 전통의 도시답게 곳곳에 유서 깊은 가톨릭 성당이 늘어서 있다.
라인강 건너로 보이는 쾰른 대성당과 쾰른 중앙역 야경
물론 가장 유명한 것은 쾰른 중앙역과 거의 붙어 있는 쾰른 대성당이다. 그러나 서기 313년부터 가톨릭 대교구가 수립된 도시답게 그보다 더 오래된 성당들이 있다.
그리고 ‘동방박사 성지’ (Dreikönigenschrein)를 포함한 많은 순례지도 있다. 쾰른 성당 안에 있는 이 유물은 원래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유스토르지우스 대성당 (Basilica di Sant'Eustorgio)에 있던 동방박사의 유골을 1164년 당시 쾰른 대교구의 폰 다젤 (Rainald von Dassel) 주교가 여기에 모시면서 만든 것이다.
쾰른대성당 안의 동방박사 유물함
사족이지만 쾰른 대성당에 붙어 있는 쾰른 중앙역에 있는 맥**드에서 파는 뢰스티 (Röstie)를 꼭 먹어 보기 바란다. 필자와 함께 여행했던 이들이 사라진 입맛도 돌아온다고 말했다. 물론 낯선 나라의 음식을 열흘 가까이 먹고 난 다음의 말이기는 했다. 그러나 독일 자체의 음식도 별미가 많으니 너무 입맛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사실 쾰른 대성당이 구도심 중심에 있으니 이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쾰른 관광의 시작이겠다. 현대적인 쾰른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가톨릭이 쾰른을 지배하기 이전에 이미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은 도시답게 여전히 로마 시대의 흔적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시내의 상점가인 호헤 슈트라쎄 (Hohe Straße)와 쉴더가쎄 (Schildergasse)는 로마 시대의 길이 그대로 남은 곳이다. 쾰른 시청사 지하에도 로마 시대의 유물을 볼 수 있다. 뢰머투름 (Römerturm)도 로마 시대의 성곽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많이 부서졌지만 슈타펠하우스 (Stapelhaus), 귀르체니히 (Gürzenich), 오버슈톨첸하우스 (Overstolzenhaus)를 포함하여 여전히 보존된 중세의 건물도 많다. 무엇보다 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늘어선 건물들을 감상하는 것도 볼거리이다.
그러나 너무 길다고 생각되면 강 위의 유람선에서 느긋하게 감상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시내에 있는 ‘상트’ (St.)로 시작하는 이름의 수많은 대성당들도 기념비적인 건물이니 볼만하다. 그리고 구도심과 도이츠 (Deutz)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면서 보이는 구도심의 실루엣도 사진에 담을 만한 장관을 보여준다. 도시도 크고 사람도 많아서 심심할 틈이 없다.
쾰른은 그 긴 역사가 남긴 흔적이 여기저기 많아서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아기자기한 재미를 맛보기에 좋은 동네이다. 그래서 쾰른의 맛을 알고 나면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 없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만큼 다양한 매력을 숨기고 있는 것이 쾰른이다. 그래서 결코 하루 이틀만으로 쾰른을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드콜롱을 만든 조반니 마리아 파리나의 초상화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오드콜롱 4711일 것이다. 북부 이탈리아 출신인 조반니 마리아 파리나(Giovanni maria Farina, 1685~1766)는 1709년 쾰른에서 Eau de Cologne, 곧 '쾰른의 물'이라는 향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파리나의 말에 따르면 이 향수는 이탈리아에서 맞이하는 봄날 아침의 느낌, 언덕 위의 수선화, 비 온 다음의 오렌지 꽃 향기를 섞은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이 향수는 매우 품질이 좋아서 그 당시 유럽 전역의 귀족들의 인기를 얻었다. 가격도 비쌌다. 당시 공직에서 일하는 이들의 연봉의 절반에 해당되는 값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 점령 지역이었던 쾰른에서는 자유 무역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파리나의 향수를 모방한 제품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서 모두 오드콜롱의 상표로 팔려나갔다. 어차피 다 쾰른의 물로 만든 것이니 그럴 만도 하였다.
오드콜롱 4711 본점 건물 전경
그러나 오늘날 Eau de Cologne 4711이라는 상표로 팔리는 향수는 파리나가 아닌 독일 사람 빌헬름 뮐렌스(Wilhelm Mühlens, 1762~1841)가 만든 것이다. 그 상표는 가게 주소 Glockengasse 4711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이 상표가 오늘까지 이른바 정통 오드콜롱을 대표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파리나가 아니라 뮐렌스가 그런 영광을 얻게 된 것인가? 카를로 파리나(Carlo Farina)라는 사람이 향수 제조 비법을 몰래 팔아넘긴 것이었다. 나중에 상표권 문제가 있었지만 결국 빌헬름 뮐렌스의 아들이 잘 수습하여 오드콜롱 4711의 명맥을 잇게 되었다. 반면에 파리나의 증손자인 장 마리 요제프 파리나(Jean Marie Joseph Farina)는 파리에서 향수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생산한 향수의 이름은 오드콜롱 엑스트라 비에이야(Eau de Cologne extra vieille)라고 하여 쾰른에서 생산되는 것과 별개의 상품으로 판매하였다.
오드콜롱 4711 향수병
그런데 여행에서 향수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먹을거리가 빠지면 안 되는 법이다. 쾰른에는 쾰쉬 음식으로 불리는 고유한 음식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네덜란드에서 헤테 블릭셈 (Hete bliksem)으로 불리는 힘멜 운 에드 (Himmel un Ääd)라는 것이 있다. 검은 푸딩과 볶은 양파 그리고 으깬 감자에 사과 소스를 끼얹어 먹는 것인데 한국인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린다.
힘멜 운 에드 한 접시
힘멜 운 에드는 원래 라인란트 지역 사투리로 독일어로 하늘과 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음식이 그렇게 거룩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독일어로 감자를 Kartoffel만이 아니라 Erdapfel, 곧 땅에서 나는 사과라고도 한다. 그런데 쾰른이 속한 라인란트 지역의 사투리로는 이것을 Äädappel이라고도 한다. 원래 과일인 사과는 나무 곧 하늘에서 나고 감자는 땅에서 나는 것이라서 사과와 감자를 다 사용하는 이 음식의 이름이 하늘과 땅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물론 한국 사람에게는 차라리 여기에 익숙한 독일 소시지를 추가한 베스트팔렌 식이 먹을 만할 것이다.
베스트팔렌식 힘멜 운 에드 한 접시
한국 유학생도 많다 보니 한식당도 있다. 독일에 가서도 김치와 김밥, 불고기가 필요하다면 구도심에서 북쪽으로 좀 올라가야 하지만 ‘노이써가 654번지’ (Neusser-Str. 654)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가격도 적당하고 그 가격에 이 정도 수준의 음식이 나온다는 것에 놀라게 될 것이다. 식당 이름 자체가 ‘불고기하우스’이다.
그러나 독일 음식을 맛보고 싶으면 여러 여행안내 앱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나오니 걱정할 일이 아니다. 이 장 끝에 나오는 홈페이지 주소를 검색해보면 대도시 쾰른의 많은 식당에 대한 안내가 나온다. 너무 많아서 그 가운데 나의 입맛에 맞는 식당을 찾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정도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추가할 것이 있다. 독일의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쾰른에도 전설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인첼멘첸 (Heinzelmännchen)이다. 백설공주에 나오는 일곱 난쟁이처럼 생긴 이들은 쾰른 시민들이 모두 잠이 들고 나면 비로소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수공업자들의 일을 거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쾰른의 노동자들은 낮에는 할 일이 없이 편히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양복쟁이의 호기심이 넘치는 부인이 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마루에 마른 콩을 잔뜩 뿌려 놓아 그만 이 난쟁이들이 미끄러져 넘어져 정체가 탄로 나게 되었다고 한다. 너무 화가 난 이 난쟁이들은 다시는 쾰른을 찾지 않게 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다. 그 뒤로는 쾰른의 노동자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되었으니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전설은 남는 법이라서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쾰른 사람들이 즐겨 말하고 듣는 것이니 그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쾰른 구도심에 있는 하인첼멘첸브룬넨 분수
전설에는 기념물이 없으면 안 되는 법. 그래서 쾰른의 구도심에 가보면 이 전설을 이야기해주는 분수인 ‘하인첼멘첸브룬넨’ (Heinzelmännchenbrunnen)이 있으니 꼭 들어보고 내 일을 도와 달라고 빌어보자. 혹시 아는가? 난쟁이들이 맘이 돌아서서 다시 도와주고자 할지. 이 분수 꼭대기에는 등불을 들고 난쟁이들을 발견해 득의만만한 양복쟁이 부인이 당당하게 서있다. 판도라의 신화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호기심은 아무도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 누구를 탓하랴. 그러나 쾰른 이런 귀여운 전설만이 아닌 독일낭만주의라는 근대 문화의 시작점이 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화적으로 매우 다양한 경험이 가능한 메트로폴리탄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독일낭만길에 나서기 전에 충분히 독일 전통의 쾰른의 향수에 젖어볼 만하다. 그러나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말자. 잃어버린 나를 찾아왔다가 쾰른에 나를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만큼 사랑스러운 도시이기는 하다. 그러나 갈길이 머니 툴툴 털고 일어나 독일낭만주의를 찾아 나서야 한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말이다.
쾰른시 안내 홈페이지는 국제도시답게 여러 언어로 접근이 가능하다. 물론 영어도 된다. (주소: https://www.cologne-tourism.com/) 일정만 확정되면 숙소와 관광 안내를 동시에 받을 수 있다. 원하는 경우 이메일로 정보를 받을 수도 있다. 쾰른을 방문하기 전에 충분한 정보 습득을 하여 더욱 풍요로운 쾰른 관광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