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강의 전설은 여전히 살아있다
쾰른을 출발하여 라인강을 따라 30km 정도 남쪽으로 가다 보면 구서독의 임시 수도였던 본 (Bonn)이 나온다. 이 작은 도시 근처에 있는 공항도 쾰른-본 공항 (Flughafen Köln/Bonn)으로 부를 정도로 쾰른과 매우 가깝다.
한국에서 본은 구서독의 수도만이 아니라 음악의 대가인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출생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음악가 슈만 (Robert Schumann, 1810~1856)도 말년을 여기에서 보냈다.
비록 통일 이후 수도가 베를린으로 옮겨져서 그 위상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대통령실과 총리실을 비롯하여 많은 행정부가 본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리고 20개의 국제연합 기구도 여기에 본부를 두고 있고, 우편과 통신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도이체포스트 (Deutschepost)와 도이체텔레콤 (Deutschetelekom)의 본사도 이곳에 있다. 물론 이런 것이 한 도시의 위상을 정하는 데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국제 도시의 면모를 갖추는 데는 이만한 요소도 없을 것이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동서독으로 분열되면서 어쩔 수 없이 본을 수도로 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언젠가는 베를린으로 다시 간다는 생각을 독일 정치가들, 특히 아데나워는 강력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정권이 유지되던 시기에 의도적으로 본을 대도시로 키우지 않았다. 본이 여전히 인구 33만 명 정도의 중소도시에 속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본도 쾰른과 마찬가지로 로마제국 시대부터 내려온 역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라인강 서쪽 지역만이 원래의 본이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강 동쪽의 보이엘 (Beuel)과 남쪽의 바트 고데스베르크 (Bad Godesberg) 그리고 서쪽의 하르트 베르크 (Hardtberg)라는 행정구역이 본과 통합되어 오늘날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기원전 38년 로마제국의 아그리파 장군이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기원전 12년에 와서 영구적인 군사 기지가 건설되었다. 이것이 본의 시작이다. 역사로 따진다면 2,000년이 넘은 도시이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종말을 거두면서 본의 영광도 사라졌다. 그래서 중세에는 쾰른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하였다.
게다가 882년 바이킹의 침략으로 도시가 불타고, 883년에는 노르만족의 공격으로 그나마 다시 세운 도시가 쑥밭이 되었다. 그러다가 프랑크족에 점령당한 이후에야 겨우 다시 사람이 살 만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쾰른의 부속 도시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이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1794년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받은 본은 문자 그대로 파탄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시민의 숫자도 5분의 1로 급감하게 된다.
더구나 원래 가톨릭 신앙이 깊었던 이 지역도 쾰른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급속히 세속 도시로 변모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교회 재산을 모두 세속 정부에 빼앗기다시피 넘겨주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프랑스가 물러가자 이번에는 프러시아 왕국의 영토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19세기 말까지 라인 강줄기를 따라 독일을 대표하는 이른바 ‘라인 낭만주의’ (Rheinromantik)의 붐이 일게 되어 많은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이 이 지역을 찾게 된다. 이러한 붐을 가져온 결정적 이유는 산업화이다. 산업화와 도시화에 염증을 느낀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과거의 낭만적인 시대를 떠올릴 수 있는 문자 그대로 ‘낭만적’인 지역으로 여기를 찾은 것이다. 라인 계곡의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순수한 자연 풍광에서 낭만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여기에서 라인 낭만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번 여행이 바로 이런 18~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향수를 찾는 것이 주목적이기는 하지만 시내 관광도 해보자.
일단 시내의 로코코 양식으로 1737년에 지은 구시청사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가면 베토벤 동상이 보인다. 거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가면 대성당이 보이고 또다시 라인강 쪽을 향하여 걷다 보면 과거 선제후가 살던 궁전으로 이제는 본 대학 본부 건물이 된 선제후 성과 더불어 그가 놀던 넓은 공원이 나온다.
1244년에 지어진 슈테른토어 (Sterntor)도 본의 명물이니 꼭 보아야 한다. 다만 우리나라의 독립문처럼 도시 개발로 원래 위치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독일에도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나 보다. 강을 건너 바드고데스베르그 지역으로 가면 요새였던 고데스부르크성 (Godesburg)의 유적이 있다. 쾰른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이 성은 1959년에 와서야 재건되어 처음에는 식당과 호텔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식당 영업만을 계속하고 호텔은 개조하여 일반 주택으로 팔렸다.
이 고데스부르크성은 역사적으로 쾰른을 중심으로 한 라인란트 (Rheinland) 지역이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세력의 강력하게 지배하게 된 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원래 가톨릭이 지배하던 지역이었던 쾰른 선제후령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의 처절한 세력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쾰른 전쟁 (Kölnischer Krieg, 1583~1588)이다.
그 원인은 쾰른의 대주교이자 선제후였던 폰 발드부르크(Gebhard Truchsess von Waldburg, 1547~1601)가 개신교로 개종을 하고 나서 가톨릭 사제의 의무인 독신제를 거부하고 아그네스 폰 만스펠트 (Agnes von Mansfeld)와 결혼을 해버린 데에 있다. 그러자 교구 수석 사제들이 들고일어났다. 또한 그레고어 13세 교황이 선제후를 파문하자 수석 사제들은 아예 에른스트 폰 바이에른 (Ernst von Bayern)을 새로운 대주교로 선출하였다. 사실 이는 바이에른 왕국과 스페인 왕국의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한 속셈에서 나온 책략이었다. 그리고 이 조치로 이들은 쾰른 대교구의 주민들의 지지도 얻게 되었다.
이에 맞서 폰 발드부르크는 자신의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리고 일부 개신교 영주들의 지원도 확보하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본에 있는 고데스부르크성을 가톨릭 군대에 빼앗기면서 패퇴하게 된다. 이 전투로 고데스부르크성은 크게 파괴되었다. 얼마 후에 폰 발드부르크는 네덜란드로 건너가 네덜란드 군대의 도움으로 본을 다시 점령하고 이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그러나 결국 더 이상의 싸움을 포기하고 슈트라스부르흐 (Straßburg)로 피신하여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쾰른 선제후령은 철저한 가톨릭 영토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본에는 가톨릭 도시의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본대성당 (Bonner Münster)과 슈티프트키르헤 (Stiftkirche)를 비롯한 성당 건물들이 도처에 있다. 일일이 다 찾아보자면 하루로는 모자랄 정도이다. 그밖에 미술관, 박물관, 전시장도 얼마든지 있다. 고전적 건물만이 아니라 현대적인 건물도 본에는 많다. 그래서 중소도시임에도 고층빌딩이 비교적 많은 도시이다. 건물 구경을 적당히 해야 이 도시를 미련 없이 떠나 다음 여정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건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강과 산이 어우러진 자연 풍광은 쾰른에서는 보지 못한 또 다른 장관이다. 본 시내 한가운데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광은 바로 ‘뒤네 탄넨부쉬’ (Düne Tannenbusch)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독일어로 모래사장 위에 심어진 전나무 숲을 의미한다. 약 1만 년 전에 라인 강가의 모래가 바람에 쓸려 여기까지 온 것이다. 원래는 폭이 600m에 길이가 8km에 이른 것이었다. 그리고 전나무를 심은 이유는 여기의 모래가 바람에 날려 주변 집에 피해를 주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이제는 건물들이 들어서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볼 수 있다.
알테촐 (Alte Zoll)은 13세기에 본을 지켜주던 성곽의 흔적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라인강과 유명한 ‘시벤게비르게’ (Siebengebirge)는 낭만이 뭔지를 보여준다. 사실 이 이름의 의미는 일곱 봉우리이지만 이 지역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약 50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있어 그림 같은 정경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 (Victor Hugo, 1802~1885)도 여기에 와서 감탄했던 역사가 있다.
본대학교 (Rheinische Friedrich Wilhelms Universität Bonn)는 7개의 학부에 학생수가 4만 명이 넘어 학생 수가 5만 명에 이르러 쾰른대학교와 더불어 이 지역의 대표적인 대학교이다. 프로이센 황제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III)의 이름을 따서 1818년 설립된 이 대학교에는 6,500여 명의 교직원이 일하고 있다. 흔히 독일의 대학교가 그러하듯이 본대학교의 371개의 건물들도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특히 앞에서 말한 대로 대학본부 건물은 쾰른 선제후가 사용하던 성이라 고풍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본의 시내만이 아니라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인 쾨닉스빈터 (Königswinter) 근처에 있는 바위산인 ‘드라켄펠스’ (Drachenfels)도 반드시 가보아야 한다. 이곳이야말로 라인 낭만주의의 전설이 어린 곳이기 때문이다. 드라켄펠스는 용바위라는 뜻인데 화산 활동으로 우뚝 솟은 바위산이다. 사실 이 산봉우리는 시벤게비르게 (Siebengebirge)에 있는 수십 개의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데 그 이름이 말해주는 대로 전설이 깃든 곳이다.
특히 바그너의 4개 악장으로 이루어진 오페라인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에 나오는 지그프리트와 용의 대결의 전설이 이곳에 있어서 용이 살던 동굴과 지그프리트의 동굴이 여기에 실제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 바위산의 이름이 드라켄펠스가 된 것이다. 산 정상에는 과거에 세운 망대 (Bergfried)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산 근처에 세워져 있는 드라켄부르크성 (Schloss Drachenburg)은 라인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건물로 알려져 있다.
1884년에 완공된 이 성은 원래 금융업자인 폰 사르터 남작(Stephan von Sarter)이 지은 것인데 정작 본인은 이 성에서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바람을 타고 이 성이 라인 낭만주의와 연관되어 유럽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그래서 이 성과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기차가 이미 19세기에 건설될 정도였다.
사실 쾨닉스빈터를 포함한 이 지역이 낭만주의의 보고가 된 것은 전적으로 영국의 계관시인으로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바이런 (George Gordon Byron, 1788~1824) 덕분이다. 특히 그의 시집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 (Childe Harold's Pilgrimage)에서 자신의 못다 이룬 사랑과 이 지역의 풍광을 적절히 혼합하여 묘사한 내용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드라켄펠스가 말 그대로 낭만주의자들의 성지가 되었다. 그 이후에도 불워리튼 (Edward George Earle Lytton Bulwer-Lytton, 1803~1873)이나 하이네 (Christian Johann Heinrich Heine, 1797~1856)와 같은 문학가들도 이 지역의 풍광을 찬미하는 시를 지었다.
그래서 독일 낭만주의와 이 지역은 거의 동일한 의미가 되어 버려 아예 관광 명소가 된 것이다. 특히 네덜란드 사람들이 하도 많이 찾아와서 네덜란드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이 드라켄펠스를 포함한 이 주변 지역의 다양한 산봉우리로 구성된 산맥을 앞에서말한 시벤게비르게라고 한다. 이는 원래 약 2,500만 년 전의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것인데 본의 동남쪽으로 쾨닉스빈터 동쪽에 이어진 작은 산맥이다. 현재 자연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있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봉우리가 많은데도 시벤게비르게 곧 ‘일곱 봉우리 산맥’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300m 이상의 봉우리가 8개 있는데 그 가운데 쾰른대성당에서 7개가 정확히 보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보는 사람의 시력에 달린 문제이니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어찌 되었든 320m 높이의 드라켄펠스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에서 7은 완전수를 의미해서 그렇게 명칭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민간 전설에서는 7이라는 숫자가 마술과도 연관되어 동굴이 많은 이 지역의 전설을 따라 그리 지었다는 설도 있다. 전설에서는 원래 산봉우리가 없이 평평한 이 지역에 마을이 들어섰으나 물이 나오지 않아 주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7인의 거인들에게 물이 나오게 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이 착한 거인들은 삽으로 흙을 파서 산을 만들어 라인강이 흐르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전설들이 라인강 줄기를 따라 포도송이처럼 이어진다. 그래서 이 강을 따라 북쪽이든 남쪽이든 자동차를 몰고 가며 바라보는 강변의 정경을 바라보다 보면 저절로 그 먼 시절까지 돌아가게 될 것만 같다.
어찌 되었든지 이 전설 덕분에 이 근처 마을 사람들은 물 걱정을 안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마을 사람들이 네덜란드의 거인들을 초대하여 라인강가의 빙엔 (Bingen)이라는 이름의 마을에 막힌 곳을 뚫어줄 것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일이 잘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거인들이 삽을 쾨닉스빈터에 두고 갔는데 그 삽에 묻은 흙이 모여 바로 시벤게비르게가 되어 전설로 남았다는 것이다. 개인과 집단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비슷한 전설이 다양한 버전으로 만들어진다.
지질학적으로 보아도 이런 전설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이기는 한다. 화산활동으로 이곳 지형이 형성된 지 한참 지난 다음인 45만 년 전쯤부터 라인강이 이 지역을 흐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로마제국 시대부터 이 지역의 돌을 캐서 여러 건물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유명한 쾰른 대성당도 이 지역의 돌을 캐서 지은 것이다.
전설을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인기 일드에 나오는 ‘고독한 미식가’처럼 배가 고프기 마련이다. 맛난 음식을 먹으러 다시 본 시내로 돌아가 본다. 본에 사는 주민의 3분의 1 가까이가 외국인이기에 독일 식당 말고도 이탈리아, 그리스, 중국, 일본, 인도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도 많다. 아마도 국제기구가 많은 만큼 식당도 국제적인 면모를 갖춘 모양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본의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면 슈테른토어브뤼케 4번가 (Sterntorbrücke 4) 근처에 있는 ‘브라우하우스 뵌쉬’ (Brauhaus Bönnsch)를 꼭 들어보아야 한다. 가격도 저렴하고 독일 음식과 맥주의 맛을 즐기고 싶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소개한 것 말고도 많은 관광 정보를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다. (주소: https://www.bonn.de/microsite/en/index.php) 본 시청에서 운영하는 것이라 쇼핑과 관광만이 아니라 문화와 스포츠 행사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여기에서 얻을 수 있다. 또한 도시의 역사에 관한 상세한 정보도 볼 수 있다. 본의 역사에 대한 흥미가 있다면 차분히 살펴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