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ncis Lee Sep 03. 2022

로렐라이 언덕의 전설이 어린 상트고아

라인낭만주의의 정점을 향해 가본다

상트고아에서 라인강 건너 보이는 로렐라이 언덕 정경


상트고아 (St. Goar)는 코블렌츠와 빙엔 사이의 라인 계곡에 있는 인구 2,800명의 매우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이 근처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인펠스성 (Burg Rheinfels), 그 건너편의 상트고아스하우젠 (Sankt Goarshausen)에 있는 고양이성 (Burg Katz)과 쥐성 (Burg Maus), 그리고 가장 유명한 로렐라이 언덕 (Loreleyfelsen)이 있다. 모두 다 독일여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잘 알려진 명소이다.  

 

상트고아라는 지명은 이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는 고아(Goar, 495~575)라는 사람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흉상이 여전히 마을 한가운데 서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많은 기독교 성인과 마찬가지로 고아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그는 현재의 프랑스 남부 지역 출신의 가톨릭 사제였는데 트리어 대교구에 선교사로 와서 활동하다가 아예 이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아가 죽은 다음에 그의 명성을 기리는 이들이 이곳으로 순례를 오기 시작하였고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 지역이 더 유명해진 것은 칼 대제 (Karl der Große, 747~814)가 이 근처에 있던 프륌 수도원 (Abtei Prüm)에 이 지역을 봉토로 선물하면서 집중적인 관리를 받게 된 이후이다. 


프륌 수도원 전경

 

1100년에는 지금도 여전히 서 있는 슈티프트키르헤(Stiftkirche) 교회가 세워졌고 그 이후 지속적인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종교개혁 이후인 1527년 헤센의 방백으로 있던 필립 1세 (Philipp I, 1504~1567)의 명령으로 이 건물에서 개신교 예배가 거행되면서 일체의 가톨릭 미사나 행사가 금지된다. 그래서 이에 따라 고어 성인을 기리는 행사도 중단되었다.  

 

그 후 1652년 필립 1세의 증손자인 에른스트 1세 (Ernst I, 1621~1693)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그를 기리는 순례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래서 1660년에는 상트고아 성당과 상트엘리사베트 성당이 건축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슈티프트키르헤 건물은 여전히 개신교의 소유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 이 지역에 보존되어 있던 고아 성인의 유물 가운데 팔뼈는 코블렌츠에 있는 상트카스토 대성당으로 옮겨지게 된다.  

서양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세속권력과 교회 권력의 부침은 늘 있었던 일이다. 교회는 권력을 추구했고 권력은 교회를 통해 권력에 대한 신의 축복을 원했으니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도 종교적 열정이 흔히 정권에 좌우되곤 하였다.  

 

라인펠스성의 전경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라인펠스성은 1245년 폰카체넬른보겐 백작 (Graf Diether von Katzenelnbogen)이 지은 것이다. 추후로 성을 요새화하여 강력한 방어 기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후에 이 성은 독일제국의 다른 모든 성의 건설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럽을 휩쓴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이 강력한 성조차도 파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부서진 잔해는 다른 건물의 건축재로 재사용되었다. 문자 그대로 그 흔적조차 거의 사라지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나마 남은 건물의 잔재는 오늘날 호텔과 음식점 그리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트고아의 슈티프트키르헤 전경

 

그리고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그 가운데에는 위에서 말한 고딕 양식의 슈티프트키르헤 (Stiftkirche) 교회가 있다. 그 교회의 지하 납골당은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으로 11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15세기 후반에 이 납골당의 회랑 벽에 그려진 그림이 특히 유명하다. 유럽 교회의 지하 납골당은 한국에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것과는 그 형태가 전혀 다르다. 주로 유명한 성직자들의 재가 아닌 유골 자체가 잘 보존되어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 화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의 재림 때 부활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부활은 반드시 영혼과 더불어 몸을 필요로 하는 사건이니 말이다. 종말이 올 때 부활하기 위해서는 몸이 필요하다는 믿음은 최근까지 유지되고 있다. 물론 지금은 의식이 많이 변했지만, 근세까지도 이런 믿음은 굳건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매장이 필수였다.  그러나 현재 유럽에서도 화장이 확산되고 있다. 이제 부활 때 얻는 몸은 생전의 육체와 전혀 다른 것이라는 ‘합리적인’ 생각이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새로운 몸을 얻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개신교에 넘어간 슈티프트키르헤에 맞서 19세기 말에 지어진 네오고딕 양식의 가톨릭 교회인 상트고아 성당과 상트엘리사베트 성당도 이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곳을 유명한 관광지로 만들어 준 것은 당연히 노래로도 잘 알려진 로렐라이 (Loreley) 언덕이다. 그런데 막상 여기를 찾아와 보면 실망하게 된다. ‘겨우’ 132m 높이의 바위산이 전부이다. 그 산 위에는 로렐라이 노천극장이 있다. 여기에서 자주 야외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이다.


로렐라이 언덕에서 내려다본 라인강

 

그래도 뭔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해서 더 살펴보게 된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언덕만 보고 가면 너무 섭섭하니 말이다. 로렐라이는 고대 라인 지역의 사투리로 ‘중얼거린다’를 의미하는 lureln과 켈트어로 바위를 의미하는 ley의 합성어이다. 결국, 중얼거리는 바위가 전부이다. 이 부근의 라인강의 물살이 빠른 데다가 작은 폭포도 있어서 물소리가 중얼거리는 것 같은 데다 로렐라이 바위에 그 소리가 반사되어 더 크게 들린 모양이다.


오늘날에는 지나가는 배와 자동차 소리가 훨씬 크게 들려 그 소리를 듣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이보다 더 유명한 전설은 배가 바위에 충돌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면서 독일어로 매복한다는 의미의 ‘lauern’과 켈트어 ‘ley’의 합성어로 배를 빠뜨리는 바위가 있다는 의미와 관련된다. 

 

고양이성 너머로 보이는 로렐라이 언덕

 

로렐라이 언덕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하이델베르크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인 클레멘스 브렌타노 (Clemens Wenzeslaus Brentano de La Roche,1778-1842)가 쓴 소설 <고드비> (Godwi)의 제2권에 나오는 발라드 형식의 이야기에 나오는 요정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곧 그가 만든 가공의 인물이 로렐라이 언덕의 요정인 것이다.  


에밀리 린드너가 그린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초상화(1837)

 

그런데 이 가공의 인물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와 같은 대가도 브렌타노가 만든 가공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로렐라이(Die Lore-Ley)라는 제목의 시를 짓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리스트 (Franz List, 1811~1886)라는 걸출한 음악가가 이 시에 피아노 반주로 부르는 노래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클라라 슈만 (Clara Schumann, 1819~1896)도 이 시에 맞추어 피아노 반주의 노래를 작곡한다. 노래로 잘 알려진 이 시가 너무 인기가 있어서 가벼운 노래를 혐오한 히틀러 정권조차도 금지시키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멘델손 (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1847)은 아예 이 전설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미완성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음악가들이 로렐라이를 주제로 한 음악을 작곡하였다.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 1903~1969)의 주장에 따르면 히틀러 정권은 유대인의 업적은 모두 폄훼하여 금지시켰는데 유대인인 하이네가 지은 이 시만큼은 도저히 금지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역사가 뭐라고 하든지 하이네의 이 작품은 낭만주의적 파토스를 나타낸 대표적인 시로 알려져 있다. 사실 낭만주의는 그 근원이 이미 지나간 먼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지식인과 귀족들의 정신적 사치의 반영이기도 한 것이기에 전설과 가공된 이야기는 얼마든지 허용이 되는 것이었다.  


모리츠 다니엘 오펜하임이 그린 하인리히 하이네의 초상화(1831)


오랜만에 하이네의 시를 읊어본다.  

 

Ich weiß nicht, was soll es bedeuten,

dass ich so traurig bin;

ein Märchen aus alten Zeiten,

das kommt mir nicht aus dem Sinn.     

Die Luft ist kühl und es dunkelt,

und ruhig fließt der Rhein;

der Gipfel des Berges funkelt

im Abendsonnenschein.    

 

Die schönste Jungfrau sitzet

dort oben wunderbar;

ihr goldnes Geschmeide blitzet,

sie kämmt ihr goldenes Haar.     

Sie kämmt es mit goldenem Kamme

und singt ein Lied dabei;

das hat eine wundersame,

gewaltige Melodei.     

Den Schiffer im kleinen Schiffe

ergreift es mit wildem Weh;

er schaut nicht die Felsenriffe,

er schaut nur hinauf in die Höh.     

Ich glaube, die Wellen verschlingen

am Ende Schiffer und Kahn;

und das hat mit ihrem Singen

die Lore-Ley getan.     


직역하면 다음과 같겠다.     


왜 이리 슬픈 맘이 드는지 모르는데

먼 옛날의 이야기가 내 머리를 떠나지 않네.     

바람은 차고 날은 어두워지는데

라인강은 조용히 흐르고

산머리는 저녁놀이 감싸네     

저 위에 앉아 있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처녀가 

경탄을 자아내네.

 

머리의 금장식이 반짝이는 가운데

금발머리를 빗어 내리고 있네.     

금빛으로 머리를 빗으며 노래를 부르네

묘하고도 매력적인 멜로디로.     

작은 배를 몰던 선원이 거친 바람을 맞았으나

암초를 볼 생각을 않고

저 높은 곳만 바라보네.     

결국 파도가 그 선원과 배를 삼켜버렸으리라

로렐라이가 노래를 불러 그리 된 것이라네.


사실 이 시에 등장하는 로렐라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정인 에코 (Ἠχώ)나 세이렌 (Σειρήν)을 떠올리게 한다. 에코는 헤라의 남편인 제우스와 바람을 피운 대가로 목소리를 빼앗긴 비운의 요정이다. 그래서 에코는 나중에 나르시스 (Νάρκισσος)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의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빠져 결국 동굴 속에서 굶어 죽고는 메아리로만 남게 된다.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진 세이렌 조각상(340~300BC)

 

호머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이렌은 원래 고유한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지어주게 된다. 그러나 전설은 전설일 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다른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비참한 운명의 여인들을 이렇게 완벽하게 아름다운 처녀로 묘사하며 그리워하는 가운데 그 근원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멜랑콜리에 빠지는 시인의 ‘감정의 사치’에 동참하는 것도 꼭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비록 독일낭만주의가 18~19세기에 걸쳐 독일어권 지역에서 철학,  문학, 음악, 미술에 영향을 미친 문화적 흐름이지만 현실의 삶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낭만주의는 지적인 사치에 가까운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젊은 베르테르처럼 유부녀에게 자기의 모든 사랑을 바치고 자살을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지닌 보통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니벨룽겐의 반지를 찾아 나서 결국 발할에 들어선 지크프리트와 같은 용기를 가지고 살 사람도 별로 없었다. 중세의 지겨운 기독교의 독재를 타파한 계몽주의와 과학주의가 인간의 정신을 세속화시킨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에 맞서 감성으로만 세상을 살아가기게는 일반 서민들의 삶이 팍팍한 것은 18세기나 21세기나 마찬가지다. 


베르테르의 무덤 앞에 선 로테(1790)


그럼에도 여전히 낭만주의에 경도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근원적으로 삶이 고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화가 만연하고 자본주의가 득세한 사회에서 인간은 물질적 만족을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에서는 모두가 나의 행복을 방해하는 잠재적 적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산업혁명 이후 줄기차게 진행된 자본주의와 결합된 산업화는 인간을 자연 파괴, 곧 우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주범이 되도록 이끌었다. 이제 인간은 서로가 적이 될 뿐 아니라 자신이 잠시 머물다 가는 지구에도 적대 세력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한한 욕망의 충족이라는 탐욕보다는 우주의 질서와의 조화를 추구하며 자연에 몰두하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러나 자본가들이 정교하게 설계해 놓은 현대 산업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생존을 모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된 현실에서 낭만주의는 결국 일부 꿈꾸는 자들의 사치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러나 생존을 위하여 세속화된 물질적 자본주의 사회라는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나의 감정과 영혼의 정화를 위하여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근원적인 본능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차라리 판타지에 몰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판타지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교묘한 착취구조 아니던가?


뉴욕증권거래소 전경


그래서 자신의 삶의 자리를 떠나 잠시라도 나그네가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록 생존을 위하여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속 사회를 버릴 수는 없지만 일정 기간만이라도 훌쩍 그 자리를 벗어나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자신의 상처받은 자아를 보듬고 달래주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그것도 아주 먼 곳으로. 일상적인 삶에서 보여준 나를 잠시라도 완전히 내려놓고  안에 감추어져 있던 상처받은 자아를 달래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그 상처가 다 치유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국에서 나그네가 되어 낭만주의의 본 자리에 가서 적어도 이미 받은 상처를 달래면서 다른 상처받은 이를 치유할 수 있는 작은 여유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치유를 위한 여정으로 라인강의 전설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것도 낭만의 근원을 찾기 위하여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말이다.


라인강 줄기를 보여주는 지형도


전설에 대하여 충분히 들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하다. 고독한 미식가의 시간이 또 다가왔다. 인구가 3,0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여기에도 하룻밤 머무르며 식사를 할 만한 곳이 많다. 특히 이 지역이 포도주 재배와 생산으로 유명한 곳이니 백포도주를 곁들인 풍성한 독일 음식을 즐겨볼 만도 하다. 상트고아 시내를 벗어나 라인 강가에 가면 식당이 늘어서 있다. 맘에 드는 곳을 찾아보자. 호텔방에 들어와 라인강을 타고 내려가는 여정을 살펴보다 보면 취기도 적당히 오르면서 낯선 숙소에서도 잠이 잘 올 것이다.

 

더 많은 정보를 위해서는 공식 홈페이지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주소: https://www.stadt-st-goar.de/)  사이트가 비교적 단조롭게 구성되어 있지만 필요한 정보는 다 들어 있다. 특히 일주일에 한 번 화요일에 서는 장터는 이 마을의 정서를 만끽하는 데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안내도 이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매우 작은 마을이지만 수준 있는 공연도 이루어지고 있디. 물론 코로나로 여러 제약이 있지만 여기 저리 정보를 찾아 노력해 보면 뜻 밖에 소득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전 16화 아우겐롤러의 전설이 있는 코블렌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