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전설이 남은 도시에서 낭만의 흔적을 찾는다
본에서 자동차로 90km 정도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코블렌츠라는 도시가 나온다. 이 도시 한가운데에서 라인강과 모젤강이 만나게 된다. 전략적으로 요충지였으니 당연히 로마제국 시대인 기원전 8년부터 군사기지가 주둔하던 곳이다. 도시 이름도 라틴어로 ‘여러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이라는 뜻의 ‘ad confluentes’에서 나왔다.
라인과 모젤이 만나는 점에 있는 이른바 ‘독일곶’ (Deutsches Eck)에는 1867년에 세워진 프러시아 왕이자 독일제국의 초대 황제인 빌헬름 1세의 기마상이 서있다. 독일제국 수립 이전까지의 분열을 극복한 상징적 존재인 그의 동상이 이곳에 서 있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독일이 이 지역을 지배하기 전에 이미 로마의 시저(Julius Caeser, BC100~44)가 이 지역을 점령하는 가운데 코블렌츠와 안더나흐 사이에 라인강을 건너는 다리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코블렌츠의 북쪽에 머큐리신과 로즈메르타신을 위한 신전을 짓기도 하였다. 이후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이 지역도 프랑크족이 점령하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노르만족이 점령하고 다시 신성로마제국의 속국이 된다.
1018년에 이르러 트리어 선제후 가문이 이 지역을 차지하면서 비로소 문화가 융성하게 된다. 그래서 이때부터 많은 교회는 물론 성과 요새가 세워졌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이 1020년부터 확충된 에렌브라이트슈타인 요새 (Festung Ehrenbreitstein)이다. 또한 슈톨첸펠스성 (Burg Stolzenfels)과 알테부르크성 (Alte Burg)이 유명하다.
14세기에 지은 린 발두인비뤼케(Balduinbrücke)는 로마제국 시대 이후 모젤강 위에 놓인 최초의 석조 다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제후의 통치도 나폴레옹이 이끄는 ‘혁명군’의 무력에 굴복하며 1794년 종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이후 20년간 코블렌츠는 프랑스 점령지역으로 남게 된다.
이때 특히 프랑스인 남자와 독일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코블렌츠의 남자아이들을 ‘쉥엘’ (Schängel)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가 딱하다. 원래 그 당시 흔한 남자 이름이 한스 (Hans)나 요한 (Johann)이었는데 이는 프랑스 이름으로는 장 (Jean)이었다, 그러나 독일어 발음에는 ‘ㅈ’ (J)이 없는 관계로 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러서 ‘솽’ (Schang)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독일어 명사를 애칭으로 부를 때 추가하는 어미인 ‘엘’ (–el)이 추가되고 이에 따라 독일어법의 음운 법칙이 적용되어 움라우트 발음으로 변형되어 오늘날의 ‘쉥엘’이 된 것이다. 원래 이는 한스를 귀엽게 부르는 말인 ‘헨쉔’ (Hänschen)을 의미한다. 물론 독일인 이외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역사적, 음운학적 의미의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원래 ‘쉥겔’은 혼혈아를 조롱하는 명사였지만 이제는 오히려 코블렌츠의 토박이를 부르는 애칭이 되었다. 슬픈 역사를 유머로 승화시키며 그 질곡을 이겨내는 인간의 지혜가 반영된 것이다. 그래서 코블렌츠 구도심의 시청사 정원에 있는 ‘쉥엘분수’ (Schängelbrunnen)에서 입으로 물을 내뿜는 이 쉥엘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사실 작아서 눈에는 잘 뜨이지 않는 이 동상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코블렌츠 구도시는 라인강과 모젤강이 천연의 방어막이 되어주어서 남쪽에만 성벽을 쌓으면 되었다. 그러나 1890년 도시개발이 시작되면서 성벽이 무너졌다. 그래서 코블렌츠는 성벽 밖 지역에 있는 신도시와 성벽 안의 구도심으로 구분된다.
당연히 구도심에 문화 유적이 많이 있다. 그 중심에는 836년에 건축이 시작된 카스토대성당 (Kastorkirche)이 있다. 그 건축 기간이 장대하여 현재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본 건물은 1208년에, 그리고 고딕 양식의 지붕은 1498년에 완성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성당 앞의 분수는 1812년에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기념하여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분수의 명판에는 나중에 코블렌츠를 점령한 소련군 사령관이 조롱하는 뜻으로 추가한 글귀가 남아 있다: ‘코블렌츠 시 사령관 본인이 검수 승인함, 1814년 1월 1일’ (Vu et approuvé par nous, Commandant russe de la Ville de Coblence: Janvier 1er, 1814)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에 능통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이런 흔적은 자본심을 구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시민의식에서는 이러한 것도 역사의 흔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합의가 마련된 것이다. 그래서 여기를 다녀가는 이방인들도 이러한 ‘문화적’ 가치를 객관적으로 음미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구도심에 있는 여러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물 가운데 1250년부터 건축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탑이 있는 립프라우엔교회 (Liebfrauenkirche)도 볼만하다. 그리고 17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시청은 과거 예수회 대학교 건물이었다.
물론 신도시 (Neustadt)에도 역사는 길지 않아도 볼만한 건물이 많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선제후성 (Residenzschloss)은 18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 도시 방어를 위한 요새로 사용되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코블렌츠의 명물은 기념물 제작으로 유명했던 브루노 슈미츠 (Bruno Schmitz, 1858~1916)가 1897년에 제작한 독일제국의 빌헬름 1세 황제의 기마상이다. 이 동상은 독일이 다시는 프랑스의 침략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애국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다. 동상 높이만 14m이고 받침대를 포함하면 37m에 이르는 거대한 작품으로 독일의 통일과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기마상은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미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쉽사리 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일 민족주의의 상징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0년 독일이 통일되면서야 비로소 그 재건 사업 논의가 다시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민감한 문제이기에 연방정부는 주정부에 그 책임을 떠넘겼다. 그런데 주정부도 머무적거리는 사이에 독일의 변호사이자 신문사 사주였던 베르너 타이센 (Werner Theisen, 1927~1993)이 모든 비용을 개인적으로 부담하겠다고 나서자 본격적인 재건 사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결국 1993년 9월 25일에야 재건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타이센은 이 기념물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 동상 주변에는 독일 국기와 16개 주기가 게양되어 독일 통일의 상징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사실 독일은 그 오랜 역사에서 참다운 의미의 통일을 이룬 시기는 상대적으로 짧은 나라이다.
오늘날 독일의 정식 국명이 독일연방공화국인 것도 단일 정치제이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지방색이 여전히 강하여 문자 그대로 지방자치제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과 마찬가지로 독일도 수시로 독일이 한 민족의 국가임을 강조하는 이들이 언론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쓰라린 역사의 흔적이 아직도 독일 국내외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독일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것은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비록 독일이 유럽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고 실제로 유럽 연합을 이끌고 있지만 ‘독일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독일이 잘 알고 있다. 그만큼 나치 독일이 인류 역사에 끼친 역사적 폐해가 큰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독일은 과거의 빚을 청산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과거의 전쟁범죄에 대하여 완전히 안면 몰수하는 아시아의 어느 나라와는 전혀 다른 태도이다.
이 지역의 풍습 가운데 특이한 것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19세기 말까지 이른바 투겐트파일 (Tugendpfeil)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비녀를, 특히 가톨릭 신자인 여자들이 꼽고 다녔던 일이다. 이는 그 당시 가톨릭이 여성들에게 강조하는 처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주로 결혼하기 전까지 꼽고 다녔다. 추측하기로는 비스마르크 정권 시절에 가톨릭교회와 세속 정부와의 주도권 싸움으로 촉발된 독일의 이른바 ‘문화투쟁’ (Kulturkampf)의 와중에서 가톨릭 교회가 기독교 신앙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착용하도록 권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성의 순결만을 강조한 점에서 오늘날에는 더 이상 받아들이기 힘든 풍습이다.
길이는 약 20cm 폭은 3cm 정도로 머리를 말아 올려 머리핀처럼 사용하였다. 이 머리핀을 꼽은 여자들은 특히 라인 낭만주의 계열의 19세기 그림에 많이 등장한다. 그만큼 가톨릭의 고전적 여성성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이는 가톨릭 교회가 사회적인 영향력을 잃기 시작한 시대인 19세기에 그 마지막 힘을 쓴 흔적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19세기 당시에는 그 아름다움에 매료된 여성들의 인기를 얻어 독일어권만이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 지역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착용하였다. 가톨릭 여성 신자는 머리에 두건을 쓰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그것이 잘 고정되도록 하는 머리핀으로도 사용하는데 실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에는 가끔 노인들만 사용할 뿐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독일은 유럽에서도 남녀평등에 관한 논의가 매우 활발히 진행되는 나라에 속한다. 특히 독일 녹색당의 눈부신 성공과 과거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좌파당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진보적인 여성들의 정치적, 사회적 발언권이 매우 강해졌다. 이는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독일 사회에서 어찌 보면 이는 낯설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독일 지역의 여성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여권 신장이 이루어졌고 특히 바이마르공화국에 와서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이는 독일 사회에서 교회의 영향력, 특히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의 감소와 나란히 진행된 발전이다.
독일제국 시절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여권 신장의 선봉에 섰지만 바이마르공화국에서는 헌법으로 여성의 권리를 남성과 동등한 것으로 명문화하였다. 그러다가 독일 가톨릭 교회가 찬양한 나치 정권에서 여성의 권리는 다시 후퇴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된 독일연방공화국에서 여성의 평등한 권리는 법적으로 다시 보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권리가 사회 현실로 나타나는 데에는 다시 오랜 세월이 걸렸다. 마침내 1980년대 좌파와 녹색당이 독일 정치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여성의 권리가 본격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권리, 특히 소수자의 권리가 보편적 인권으로 보장되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리기 마련이다
다시 코블렌츠로 돌아와 보자. 코블렌츠와 관련된 또 하나의 유명한 인물은 알텐 카우프하우스 (Altes kaufhaus)에 있는 아우겐롤러 (Augenroller)의 동상의 주인공이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1536년에 사망한 요한 루터 폰 코베른 (Johann Lutter von Kobern)이다. 그는 선제후의 집사이자 ‘약탈기사’ (Raubritter)이기도 하였다. 약탈기사란 중세 시대에 실제로 기사 지위에 있었으나 강도질로 축재를 한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14세기 이후 기사와 같은 하위 귀족들의 생활은 매우 곤궁해졌다. 귀족들의 전속 군대가 용병으로 대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의적으로 지역에 세관을 지어 강제로 주민들에게서 통관세 등을 갈취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경우를 두고 길가에 몰래 숨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무기로 약탈하는 것을 연상시키는 ‘약탈기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로 도시를 약탈하는 기사 집단도 존재하였다. 이들은 도시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까지 하였다. 어디나 먹고사는 일은 쉬운 법이 아니었다. 그리고 로빈후드와 같은 선한 약탈기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가 바뀌면서 궁지에 몰린 기사들이 생존을 모색하다가 만행을 부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한 전설에 따르면 폰 코베른은 코블렌츠 근처에서 귀족 가문에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방탕한 생활을 한 그는 결국 빚을 많아져 가난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친구와 길가 숲에 숨어서 몇 시간 동안 길을 바라보다가 그만 지나가던 농부들에게 잡혀 관청에 끌려오게 되었다. 관청에 끌려간 그들은 사실 지나가는 상인을 약탈할 계획이었음을 자백하게 된다. 그런데 폰 코베른과 친구는 별로 능력이 없는 이들이라 이전에도 그런 계획만 세웠지 성공을 거둔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당시 칼 5세 황제 (Karl V)의 명령으로 약탈기사에 대한 형벌이 강화되었기에 본보기로 엄벌에 처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탄원서를 내며 용서를 빌었지만 결국 이들은 코블렌츠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전설에 따르면 그는 참수형을 당하는 순간 매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혀를 내밀었다고 한다. 정확히 비교하자면 한국의 이경규 씨가 한때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른바 ‘눈알 굴리기’ 재주를 선보인 바 있는데 바로 그렇게 한 것이다. 폰 코베른이 이렇게 사형을 당한 날이 1536년 10월 14일이었다. 그 내용은 문서로 정확히 기록되어 남아 있다.
코블렌츠 시내에 있는 알테 카우프하우스 (Altes Kaufhaus)를 개축할 때 발트너 (Joseph Waltner)라는 사람이 커다란 시계를 만들었는데 바로 폰 코베른이 지었을 법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얼굴 모형을 만들어 시계에 연동시켰다. 그 얼굴의 눈이 시계에 맞추어 좌우로 흔들리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30분마다 혀를 내밀게도 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이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는 와중에 누군가가 그만 그 시계를 훔쳐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1965년 이 건물을 다시 세우면서 시계도 새로 만들어 여기에 장착하게 된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말로는 지금의 시계가 원래의 것 만한 수준의 작품은 아니라고 하니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과연 원래 이 시계와 얼굴 모형이 폰 코베른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저 하나의 전설일 뿐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전설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계는 이제 코블렌츠의 명물이 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사실 어느 도시나 이른바 ‘도시괴담’이나 전설이 있는 법이다. 그러니 너그럽게 이해하고 이 전설을 받아들이며 즐기면 그만 아니겠는가? 이제 와서 탐사보도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를 시작할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다.
전설을 뒤로하고 이제 다시 어둠이 내린 시내로 돌아와서 밥을 먹어보자. 독일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보아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 싶다면 호헨촐러른슈트라쎄 (Hohenzollernstrasse)에 있는 그리스 식당을 추천한다. 물론 모든 식당이 그렇듯이 여기에서 파는 것이 ‘순수한’ ‘오리지널’ 그리스 음식은 아니지만 맛이 훌륭할 것이다. 아니면 코블렌처슈트라쎄(Koblenzer Strasse에 있는 Antoniushof)에서 독일의 수준 높은 리슬링이나 부르군더 포도주와 함께 하는 식사를 즐겨볼 만도 하다.
물론 여기에 소개한 것 말고도 많은 볼거리와 음식이 있다. 상세한 정보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찾으면 된다. (주소: https://www.koblenz-tourism.com/) 이 사이트에서는 영어로 정보를 검색할 수 있으니 독일어를 몰라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특히 코블렌츠에서 할 수 있는 관광을 10개로 정리하여 소개한 내용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어느 동네에 가든지 미리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면 즐거움이 배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