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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Aug 20. 2020

결혼식 사회자의 법칙

걱정 안 해도 돼. 너를 신경 쓰는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사람들이 나만 보는 것 같아.”

“착각하지 마. 아무도 널 신경 안 써.”


서른 살 무렵, 처음으로 친구에게서 결혼식 사회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자격은 충분했다. 나는 어여쁜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잘 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무슨 미신인지 그 당시 결혼식 사회는 친구나 지인 중에서 꼭 아들을 낳은, 즉 다복한(?) 남자에게 결혼식 사회를 맡긴다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어이없는 풍습은 함 파는 행사와 함께 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퍽 다행이다.


사회자로 내정되자 걱정이 앞섰다.

우선 새 양복이 필요했다. 양복은 있었지만 결혼식 사회자니까 멋진 양복을 입어야 했다.

당일에 적당히 자라도록 나흘 전쯤 이발도 말끔하게 했고, 한동안 피부 관리에도 신경 썼다.

사회 멘트를 쓰고 여러 번 고쳐가며 공들여 준비했다.


결혼식 전날, 떨리는 마음으로 잠을 설쳤다.

샤워를 오래 하고 머리단장도, 향수도, 구두도 반짝반짝.

이 정도면 완벽했는데 식장에 도착해서도 수시로 화장실을 드나들었다.

소변이 자꾸 마렵고 손을 자꾸 씻고 싶고 넥타이가 자꾸 비뚤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황청심환을 먹었는데도 가슴이 진동벨처럼 떨렸다.

“그럼 지금부터~”

몇 번을 연습했는데,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시간이 다가오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되었다.

하객들이 좀 시끄러웠으면 좋겠는데, 다들 일찌감치 착석해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마치 다음 올림픽 개최지 발표를 숨죽여 기다리는 사람들 같았다.

그러니 첫 멘트로 준비한 “잠시 후 예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장내에 계신 하객 여러분들께서는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소중한 대사가 머쓱해졌다. 조용한데 조용하라고 할 수도 없고 이미 앉아 있는데 또 앉으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신랑 아무개 군과 신부 아무개 양의 결혼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짧은 대사를 하는데 목소리는 덜덜 기어들어가고 한 마디 한 마디 진땀이 났다.

식순을 외고 대사를 수없이 연습했는데도 좌불안석이었다.

주례를 소개하고 신랑이 들어오고 신부가 들어오고 성혼선언문까지 진행되는데 수시로 대사를 버벅대거나 말이 씹히는 것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아이고, 내 첫 결혼식 사회를 이렇게 망치는구나. 미안하다, 친구야. 다음에는 잘해보마. 흑흑.


축포가 터지고 결혼식이 무사히 끝났지만 나는 비교적 무사하지 못했다.

셔츠가 온통 땀으로 흥건했고, 마치 결투를 치른 것처럼 기진맥진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거기서 말을 더듬다니. 쓸데없는 애드립은 왜 했을까. 그때 그 멘트가 아니었는데…

실수에 대한 자책감으로 기가 죽었다.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기 두려웠다.

 얻어맞은 개처럼 비실비실 눈치를 보며 피로연장으로 가니...


친구들은 이미 뷔페 음식을 접시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볼태기 미어터지게 먹으며 자기네끼리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한 친구가 자리를 내주었고 콜라를 한 잔 따라 마시며 슬쩍 눈치를 보았다.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짜식들. 서운하네. 빈말이라도 수고했다 해주지 않고. 그깟 실수, 괜찮다고 한 마디 해주면 좀 좋아.

그런데 신랑이 스텝이 꼬였네. 신부가 너무 크게 대답을 했네 이런 얘기만 왁자지껄 떠들 뿐이었다.

아무도 진땀 흘리던 내 초라한 모습을, 실수투성이 어색한 멘트를 기억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결혼식에 사회자는 없었구나. 나 혼자 부끄러웠구나. 나 혼자 쥐구멍을 찾고 나 혼자 진땀 흘리고 나 혼자 나를 신경 썼구나.


그러하다. 누가 사회자 따위를 신경 쓰겠는가.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는 것을.

그런 생각이 들자 별안간 식욕이 동했다.

이미 불콰하게 취한 친구들 사이에 끼어 나도 뷔페 음식을 산처럼 갖다놓고 우적우적 퍼먹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무대에 오르기 전 전전긍긍하는 사람에게, 좌불안석인 나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었다.

“괜찮아, 걱정 마. 아무도 너한테 신경 쓰지 않는다니까.”


내 얼굴을 유심히 보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는 게 필요하다.

가끔은, 때때로. 어쩌면 항상.


이걸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 더 유연하고 우아하게 살지 않았을까.

뭐든 조급하고 불안하고 전전긍긍하는 나를 발견할 때, 가끔 해보는 생각이다.


*

Photo by Mélanie Villeneuv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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