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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 Feb 27. 2024

지난 6개월 동안 얻은 것들

나의 첫 프랑스 스타트업



다음 주 수습 기간 종료를 며칠 앞둔 어제 수요일 오후 3시, 급작스럽게 A와의 미팅이 잡혔고 아쉽게도 당일 해고 통보를 받음과 동시에 퇴근할 때 노트북과 충전기, 출입증까지 반납을 하고 해지 계약서에 싸인까지 하면서 6개월간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다소 무례하게 느껴진) 마무리에 기분이 안 좋았지만, 침착하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면서 여하튼 기회를 줘서 고마웠다, 같이 일하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더 기여를 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게 생각한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이유를 물어봤다.



A가 말하길, 


이 포지션은 비록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이지만, 20%가 기존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알고리즘을 개선하는 업무이고, 나머지 80%는 직접 소프트웨어 개발, 데이터 엔지니어링 및 버그 개선을 해야 하는데 - 네가 지난 2달 동안 비록 data science 업무 (논문 리뷰, 정보 수집, 프로토타입 개발)는 정말 잘해줬지만, 소프트웨어 개발 스타트업 특성상 매우 테크니컬 한 프로필이 필요하다. 정말 빠르게 기술 수준을 올렸으나, 데이터 엔지니어링 측면에서 조금 부족하다. 내가 더 엔지니어링 온보딩 관련해서 도와줬어야 했는데, 네가 알아서 혼자 다 하게 한 것 미안하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통보하게 되어 미안하다. 추천서를 써줄 수 있다.




복합적인 감정이 몰려왔다. 더 이상 나 혼자 유일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서 고군분투하며 황무지를 개척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해방감, 나름 애정을 갖고 일했던 회사에서 반나절만에 버림받은다는 섭섭함, 또다시 구직을 해야 한다는 막막함, 외국인으로서 프랑스에서 생산성을 매번 증명해내어야 한다는 냉정함, 지난 6개월간 모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결과물까지 도출해 낸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




최근 잘했다고 생각했기에 사실 순간적인 충격이 컸다. 그렇지만 얼굴에 미소를 유지한 채, 해고를 통보하느라 울 것 같은 표정의 A를, 해고당하는 내가 역설적으로 침착하게 다독여줬다. 괜찮아, 기회를 줘서 고마워! C'est la vie. 모든 회사 동료들에게 개별적으로 마지막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 팀원들, 어제까지 협업하던 다른 팀 엔지니어 분들은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다들 내가 진작에 수습 기간을 끝낸 줄 알고 있었다. 업무를 혼자 정말 잘 해내서 인상적이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유감이다. 도대체 언제 통보받았냐. 계속 연락하고 지내자. 



안녕하세요! 저는 수습 기간을 통과하지 못해서 오늘부로 이곳에서의 업무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이러저러하게 도와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제가 조잡한 프랑스어로 항상 귀찮게 질문 많이 했었는데, 그때마다 항상 친절히 도와주셨어서 감사해요! 언젠가 또다시 만나길 바라며, 항상 행복하세요!




인생은 정말로 한 치 앞을 모른다고는 하지만, 유독 최근 4년간 나의 삶은 매 순간 일렁이는 파도와 같다. 터덜터덜 가벼워진 가방을 메고 집에 돌아와서 피자와 맥주를 와구와구 먹고 정다운 지인분께 해고당한 속상함을 털어놓고 위로와 격려도 받았다. 물론 푸념을 해봤자 현재의 일 해결에는 도움이 안 되고 부정적인 감정을 친한 분들께 공유하는 것도 죄송하지만, 적어도 당일 저녁만큼은 앙투완 욕도 하고 짜증 난다고 막 투덜거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되돌아온 백수로서의 첫날이 밝았다. 그래도 지난주에 잘렸을 경우 vs 통과할 경우를 나눠서 해야 할 것들을 미리 적어놨기 때문에, 멘붕에 빠지지 않고 해야 할 것들을 해낼 수 있었다. A와 팀 동료에게 연락해서 감사 메시지와 더불어 링크드인과 pdf 버전으로 추천서를 써줄 것을 부탁했고, 4년간 연을 맺은 과외 업체에 연락해서 4명의 학생을 주중에 받았다.





A가 흔쾌히 링크드인과 pdf로 추천서를 써줘서 고마웠다. 비록 그의 기대 수준을 따라잡기에 나의 종합적 역량이 그의 기준에서는 부족했지만, 내 삶의 은인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우선, 한창 스스로의 기술적, 언어적 역량에 회의감이 들었던 작년 이맘때 먼저 내게 연락을 줬었고, 6개월간 불어가 전혀 유창하지도 않고 리눅스 터미널, 깃을 초짜처럼 다뤘는데도 불구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줬고, 지속적으로 부담스러운 기술적, 이론적, 언어적, 인간관계 과제들을 마구 던져주는 바람에 절대적인 실력치 및 막무가내 정신이 많이 늘었다. 행동함으로써 오랫동안 스스로 갖고 있던 고정관념 (나는 코딩을 못해, 불어로 일하는 건 아직 무리야, 고집이 세..) 도 어느 정도 뛰어넘을 수 있었고, 불확실함, 변화하는 상황이 이제는 크게 두렵지 않다. 도움도 잘 요청한다. 철저하고 완벽하고 실수 없고 잘해 내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성공뿐만이 아니라 실패나 좌절까지 모두 쭉 겪어 나가는 거야. 결과가 좋아야 최선이 아니야. 열심히 해도 결과는 나쁠 수도 있어. 좌절이 오더라도 피하지 않고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거야. 끝까지 겪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마무리가 되지. 그 모든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 최선이야.
- 오은영의 화해




해고당한 적은 처음이라 솔직히 창피하기도 하다. 알고 보니 내 전임자 2명은 4달 만에 비슷한 이유로 잘렸다고.. 그들은 프랑스인이었고 나는 언어 핸디캡도 있었는데 6개월 꽉 채워서 버텼으니, 선방한 건가 C8.




내 깜냥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 미련이 없고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관점까지 좌우할 수는 없는 법. 그렇지만 스스로 통제가능한 영향력의 원을 늘렸고, 항상 밝은 미소로 먼저 인사하고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눠주려고 노력했으며, 덕분에 우호적인 동료들을 만들 수 있었다. 혼자서 거의 모든 것들을 해내야 했기에 자생력도 늘었고, cv에 자신 있게 올릴 수 있는 프로젝트들도 생겼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리기에, 이 상황이 전화위복이 되기를 바라며 또 다른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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