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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 Feb 27. 2024

소주 3병이 가리키는 길

나의 첫 프랑스 스타트업


6개월 수습 기간을 꽉 채우고 당일 해고 통보를 받으며 황망하게 회사를 떠나고 2주의 시간이 흐른 이틀 전,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와 수학 과외 2시간을 하고 헬스도 30분 다녀오고 코딩도 진득하게 했다. 그러다가 키보드가 잘 안 눌려서 다른 키보드를 찾던 중, 전 회사에서 받았던 애플 매직마우스와 매직키보드를 발견했다. 오후 2시쯤 A한테 문자를 보내서 최대한 빨리 되돌려주겠다고 했다. (한 정거장 거리에 사는 동네 이웃쯤 되시겠다). 오늘 저녁 6시 20분, 우리 집 지하철역 1번 출구.




그냥 돌려주기는 정 없어 보이기도 해서, 그리고 2주 전에는 너무 경황이 없던 나머지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하고 쌩하니 나와버렸기 때문에.. 샛노란 미모사를 한 아름 샀다. 비록 코딩 실력 부족으로 잘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만났던 직속 상사분들 중에서 최고의 사수였고, 내게는 은인이었기 때문에 소소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8월 첫 출근날 라멘이랑 김치도 얻어먹기도 했었고...





1번 출구에서 키보드와 마우스, 그리고 미모사 한 다발을 손에 안겨줬다. A가 나도 너한테 선물이 있다면서 Nerdy 한 가방에서 주섬주섬 소주 3병을 꺼내서 안겨줬다. 파리에서 전 프랑스인 팀장님한테 소주 선물을 받게 되다니. 뭘 제일 좋아하는지 몰라서 다 샀다고 하는데, 이 상황이 웃퍼서 복숭아 맛을 제일 좋아한다고 답해줬다. 구 팀장님, 현 동네 이웃님께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서 돌아오는 길, 뭔가 기분이 좋았다. 소주 3병을 선물로 받고 나니 문득 내가 프랑스어와 테크 분야에 애정이 있다는 것도 깨달아버렸다. 이제 막 불어, 코딩 머리가 트이는 기분이었는데! 마치 똥 싸다 중간에 찝찝하게 끊긴 기분이랄까. 




인생은 내가 문제를 해결하고 책임을 지려는 주체적 태도가 관건인 것 같다. 비록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만 해도 사랑이 주된 동력이 되어 왔지만, 이제는 불어도 지금보다 유창하게 더 잘하고 싶고, 프로그래밍도 훨씬 잘하고 싶다. 그리고 A의 얼굴을 보니 다시금 떠오른 6개월 전의 초심. 그때 나는 프로그래밍과 비즈니스 프랑스어 실력을 늘리고 싶어서 이 회사 인터뷰에도 열심히 응하고 애정을 갖고 다녔던 거였다. 업무 능력, 인성이 완전 개판이었으면 3개월, 아니 1개월 안에 해고당했을 거다. 안전지대를 벗어나서 도전을 한 거였고, 아웃풋과 피드백이 돌아온 거다. 오늘 밤에는 일단 복숭아 소주를 마셔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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